급히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뛰쳐나왔다. 비행기의 도착시간을 생각해봐도 공주님이 연락을준 시간은 꽤나 늦었다. 질문은 하지않는단 약속이었고,
이런 이해할수없는 행동은 지금와서 보이는것도아니다. 단지, 단지 나는 공주님의 얼굴이보고싶었다. 희미해져만가는 기억에 새로이덧씌우고싶었기에...
만나기로한 장소는 *에비스. *시부야 내 지명
그녀는 오늘밤은 느긋히 보내고싶으니 호텔을 예약해두었다고 말했다. 맨 처음, 그녀의 입에서 그 호텔명을 들었을떄 내 귀를 의심했다. 어딘가의 공원이라던가 오픈카페의 이름이겠지하고 착각했었다. 최고급호텔, 아드막히 먼곳에서 바라본 기억밖엔 없는곳. 평소엔 좀처럼 입지않는, 무거운 느낌의 수트를 꺼내 클리닝을 끝내고 돌아온뒤 셔츠를 입고, 나는 역으로 달렸다. 역앞의 상점가는 활기로웠다. 아마 언제나이정도로 활기차겠지만말이다. 이 모든광경이 내 눈에는 선명하게 채색된듯 보였다. 노점의 지붕대밑에 매달린 할로겐램프들의 불빛과 싸고 맛있다며 호객행위를 서슴치않음에도 시원하게만 들려오는 아저씨의 목소리 자전거의 긴 열과 싱싱한 생선들의 내음. 하지만 그런 볼거리조차 내 마음을 혹하게 할수는 없었다.
홈에서 전차를 기다리며 점점더 초조해질뿐.
나는 지금, 일초가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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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도착하여 프론트에 이름을 밝히자. 종업원이 왠지 쓸데없이 멋들어지게만든, 룸넘버가 적힌 금속으로된키를 건넸다. 그러면서 종업원이 먼저 객실에서 기다려줬으면 한다는듯하나 프론트의 번쩍이는 검은 대리석의 바닥을 가로질러,입구가 내다보이는 로비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한시간정도를 기다렸을때쯤. 프론트에 다가가는 눈익은 인영이보인다. 그 인영이 양손에 든 짐은 생각했던것보단 적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는 은색의 머리핀이, 뒷머리를 묶어두고있는게보였다. 나는 재빨리 일어서서엘리베이터 홀에 향하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는 내가 뒤에있다는걸 전혀 눈치채지못하고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여 기내에 오르자 나는 그녀의 시계를 피해 등뒤로 돌아섰다. 목적층의 버튼을 누르는 그녀, 넓은 엘리베이터의 안은, 우리들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어서와」라고 말했다.
침묵이 자리한 이곳에서 갑자기 말을꺼낸 탓인지,
반사적으로 허둥대며 정면에있던 문에 부딪치는 그녀. 그뒤 그녀가 뱅글하고 뒤돌았을때,우리들은 눈이 맞았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활짝 피어지기 시작하였고,
이윽고는 눈물을 머금으며 표정을 바꾸었다. 울먹이며 내 목에 팔을 감는 공주님.
그녀가 눈물을 머금은 이유는, 아마 재회로인한 기쁨때문인거겠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붙들고서 그간의 인사대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카나가... 돌아오지않아요.]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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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방은 넓었기에 우리들은 그 넓음을 주체할수가없었다. 지나치게사치스런 가구들과, 크디큰 침대.그 모든게, 우리에겐 어울리지않았다. 넓은방의 커텐을 열어젖히자 한장의 큰 유리가 있었고. 그 유리엔 시부야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시부야의 거리는 한낮과도 같이 밝았으며, 그 빛이 방의 벽에 반사되어 출입문 근처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고있다. 불을 끈채인 방의 모퉁이에 몸을 기댄채로 그 어둠에 자리하는 그녀.
창밖을 보며 나는 그 아름다운 사자와같은 여자를 떠올려냈다. 날씬하게뻗어 탄력있어보이는 몸과, 한눈에봐도 날렵해보였다는게 기억난다.
하지만 이젠 어떤 목소리였는지는 기억나지않는다. 한동안 울먹이던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단지 나를 붙들어안은채 떨고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 메달린 은색의 머리핀. 그걸 자세히보자 싸구려로된 쇠붙이로, 끈 위에는 인도화에 등장하는 신이 조각화처럼 세겨져있다. 이건 분명, 델리근처에서 가져온, 그녀가 말하는 [귀여운것] 이겠지. 어떻게 그녀의 머리를 모아주고있지만, 머리핀이라고 부르기엔 미덥지않기만하다. 그녀가 침대에누워 잠결에 뒤척이는것만으로도 구부러지며, 부러질것만같다.
내가 모르는 인도의 거리. 친구가 건네준 사진에담긴 숫자에따라, 그녀는 움직이고있는것일까? 칠흑과도같은 델리의 밤, 카나가 돌아오지않는다는건, 그 델리의 어둠에 먹혀버린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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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묻지않았다.
한동안있자 그녀는 드디어,
[다녀왔어요.] 라며 입을 열었다.
내게[정말...보고싶었어요.] 라고도 말해주었다.
그뒤 그녀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들쑤신뒤, 보기좋게 포장된 만년필이라던가가 들어있을법한 직사각형으로된 상자와, 여러 종류의 담배들이 섞여담긴 상자도 꺼내어, 기념품이라고 말하며 내게 건네주었다.
크래커나 초콜렛,사탕같은, 말하자면 귀여운 패키지들로 밖엔보이지않아,
외견만보고선 담배라곤 생각되지않는다. 그녀는,[직사각형으로된 상자는, 아직 열지않아줬으면 해요.] 라고 말했다.
그러곤 [열어야 할때가 올테니깐요.] 라고도 말했다.
나는 솔직히 [알았어.] 라고 고개를 끄덕인뒤,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뒤 침대에 가자. 라고 말했다.
깊은밤이 다가오자 비가내리기시작했다. 우리들은 침대를 빠져나와 거울너머,
비에 흐릿해져만가는 시부야의 거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였으려나, 그녀가 이상한걸 말해왔다.
[당신, 영화라던가 좋아하나요?]
[음, 평범하게 좋아하는정도려나?]
[그럼 스토커라는 무서운영화, 본적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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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왜 묻는걸까? 하고 의아해했다. 그 타이틀로 연상되는건 평범한 범죄라고 생각되는 그것뿐인데 그녀가 영화의포스터에 나온 사진을 묘사하기 시작했을때,그게 무언지 알았다. 타르코프스키의 그것이다.나는 수긍할뿐인,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미스테리한 영화네.] 라고만 말했다. 그녀가 그 영화에대해 뭔갈 말하고싶은듯했고, 그 내용이 영화광들의 잘난체하듯하는 감상 같은게 아니란건 짐작된다. 그녀는 작은 손가락으로 유리위를 스윽거리며 무슨 그림이라던갈 그리듯 미끄러지게 놀린뒤, [비.]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영화 속에는, 물이 한가득 사용되었다고 말하는그녀의 손가락엔 물방울이 있었다. 그녀는 유리 너머를 손끝으로 톡톡치며, 물방울을 흘러떨어뜨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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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 영화를 어디서 관람했던걸까. 이젠 오래되었기도하고, 컬트하기도하니, 어찌 생각해봐도 그녀가 즐거이 즐길만한, 훈훈하고 좋은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있자니, 한두번 관람한건 아닌듯 싶었다. 그 기억은 나보다도 선명했다. 그녀의 이야기로 기억나는 신도 있을 정도다. [어디서 본거야?] 라며 묻자
[인도에서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헤에, 극장공개같은것도 하는구나.」 그러자 그녀는 다르다며 고개를 저었다. [영상기재나 관객석을 갖춘 바 같은곳이 있는데,
극장공개가 잦지않거나 적은 해외작품만을 한동안 상영하는곳이라 그곳에서 봤어요.
인도사람들은 말예요, 영화를 정말 좋아해요.]라며 말한뒤
[그리고 거기서 본 스토커란 영화에는
스토커라고하는 안내인과 두 손님이 굉장히 위험한 구역에 들어가는거에요.
그 구역의 근처엔 경찰이 한가득있는데, 이게 군대였었나? 어느쪽인진 잊어버렸네요.]
라고 덧붙여 말하고선 숨을 돌리는 그녀를 보며. [그랬지, 구역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대다수가 돌아오지않았고말야. 운이 좋았다면 뭔가를 가지고 돌아올텐데말이지.] 라고 말하자.
[그래요, 다들 돌아오지않는거에요. 카나처럼, 다들 죽어버리는거에요.]라는 그녀..
거기까지 말하자 나는 드디어 눈치챘다. 그녀가 안내인에의해 이끌어지는 투어의 손님이라는걸, 그녀가 그 위험한 여행의 참가자에 자신을 빗대고 있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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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심경이 복잡하다곤하나 영화의내용은 단순하다. 구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장소엔 검은상자가 있으며, 그곳을 국가가 봉쇄하고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구역에 숨어들어간뒤 살아돌아온 자들은 보물을 산처럼 쌓일정도로 손에 넣는다. 그렇지 못한자들은 그런 막대한 부에 걸맞을정도로 참혹하게 죽고만다. 나는 이게 이게 합당한건지에대해선 알지못한다.
뱅 돌려말하지않았기에,
그녀가 내게 그런이야길 하는이유에대해 어떻게 알아내었다. 공주님은 분명, 그 영화를 맥주라도 마시며 가끔씩 봐둔거겠지.
시간죽이기를 겸해서, 어디의 누군지도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말한뒤 그녀는벌벌떨기시작했다. 구역의 관광객과 자신을 겹쳐냈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렇게 될거라며. 이런 가볍지않은 이야기를 들어주고있는 나는 어째선지 냉정했다. 아마도 그 디스켓을 만졌던 밤부터, 어렷품이 눈치채고있었던거겠지. 즉, 이 이야기를 들은나는 그녀가 내게 거짓을 말했단걸 알았단 말이된다.
그 디스켓의 내용은 두말할 필요없이 위험한것이었다. 보물에대한 소문과 델리라는 이름을가진 미궁의지도가 담겨있기에,
디스켓이 그곳으로 그녀를 부르고있는 편도티켓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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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인도문과 *로디정원에서 * 델리소재지 같은 남자를 두번이나 언뜻 보았다고했다.그녀는 그곳에선 관광객이었다.
토산품과 자전거택시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그러니 [관광객이 가끔 같은코스를 헤메는건 자주있는 일이잖아.] 라고말하자 그녀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이건 절대 그렇지않다며, 그 남자는 인도인으로 상의엔 *쿠르타를 하의는 데님을 입은남자라고한다 *쿠르타 : 인도전통의상
아무래도 석연치않다며, 눈 앞의 풍경은 안심할수있을만한게 아니라고하고, 그녀는 등골이 오싹하다고말했다. 그뒤 [여권도 재발급받고, 헤어스타일도 바꿔야겠어요...] 라고말한 그녀는 그렇게까지만 말하고선 갑작스레 입을닫는다.
비가내린다.
공주님이 천천히, 응석부리듯이 내게 기대온다. 그녀를 안고서 머리를만지자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무슨일이 일어날것만같은 이야기가, 마치 옛날이야기처럼들린다. 옛이야기의 잔혹함을, 이야기속에선 정의로 슬쩍 바꿔놓을수있을것처럼말이다. 그런 그녀의 말투가 나는 시원스레 나를 진정시켰다.
이야기를 끝낸그녀는,
[카나에게 가볼까..]
라고 눈을 감은채로 말하고선, 곧바로 침식을 내기시작했다.
꽤나 지쳤던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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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침대에 뉘여 재워둔뒤, 한동안 멍하니 어둠속에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녀가 말한걸, 머릿속에서 되세기며,생각이 정리가될때까진 그녀의 곁에있었다. 그녀는 어째선지 엎드린채로 자고있다.깊은잠에 접어들기까진 그 상태로자다,
이제는 팔을굽혀 배꼽에 맞대고선 잔다.그런 그녀의 예쁜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하고 찌르자,
가려운건지 미간에 주름을 잡는다.
난 이런 그녀가 어린아이같기만하다. 그녀의 손목을 살짝 잡아본다, 반응은없다. 나는 침전등의 불빛만에 의지한채로 PC를 켠다. 역시나 고급호텔이다.
DELL의 컴퓨터까지 구성품으로 제공하다니말이다. 처음으로 따닥여보는 키배열인지라 타이핑이 어려워 어깨가 뻐근하지만, 오늘은 그마저 기분좋았다.
오늘의 난 혼자가아니다. 오늘의 난 그녀의 침식을듣고있다.
미약하게 상하로 리듬을 타듯 숨쉬고있는 그녀를 나는 볼수있다.
나는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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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고백을 의심하는것은아니나, 그 배경이 알고싶었다. 그런게 만약있다면,이지만 말이다. 귀국하지않은 일본인여성에게, 이유나 원인이있다면 아무래도좋다. 그런 여자들이 일년에 얼마정도의 수인지 어느정도라도좋다며. 보통사람에게있어 그녀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할뿐이다. 하지만 그곳에 순서를 부여하여 진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할수있는 녀석도있다. 그녀석이 바로 내 친구다. 친구는 움직이는 어둠, 매일이다르게 갱신되는 정보의 파수꾼이었다. 언 더 월드의.
친구는 연예인이나 프로야구의 시합결과나 음악엔 전혀 관심을 갖고있지않지만, 어딘가의 자살지원자에게 매일이고 부지런히 메일을 보낸다거나 오사카의 소규모 공장의 주소를 토대로,어느정도의 자재가움직였다던가, 그런 조사엔 여념이없다. 친구는 방에서나오지않는 동시에 굶어죽는, 아사하지도않는다. 이 말도안돼는 모순.
가능한한 외출도하지않는 친구가 운동화를 갖고싶어한다는것 자체가 역설적이다. 그 콜렉션은 본인의말에 의하자면 꽤나 굉장하다는듯하다. 친구는 동전이한푼이라도 제게 떨어지지않는 개인적인 해킹이나 크래킹엔 흥미가없다. 그런 친구는 정보의 흐름속에서 잠들어있는 사금을 주워낸다. 즉, 히키코모리인 주제에 나보다는 리치이기도 하다. 사금을 주워내는 리치인 친구가 살펴준 데이터들은 제법 신용할수있는 내용이란말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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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보내고 담배에 불을붙인다. 그녀의 잠든얼굴을 보고있자 갑작스레 커피가 마시고싶어졌다. 룸서비스로 호출한후 주문을 넣자, 종업원이 갓타내온듯, 따뜻한 커피를 테이블에 앉혀주는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않았다. 문에 노크가 울리는것과 거의 동시였을쯤에, 친구에게서 답장이왔다.
>당장 조사해보마.
>그전에, 이런 얘기라면 들어본적이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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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의 *60미니츠에서도 다뤄냈을정도로 문제시된 사건이야. *유명 다큐멘터리
>여행지에서 우연히만난 현지인에게서
>여행경비를 대신 지불해주는 대신,
>여행자의 자국에 살고있는, 의뢰인의 가족에게 짐을 건네줬으면 한다 라던갈 부탁받는데,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무슨 땡잡는 이야기냐 할지도모르지, 하지만 짐속에는 하얀가루가 들어있다이거야.
>현지인의 감언에 속은채, 짐을 옮기다 운나쁘게 공항의 서큘리티에 붙잡혀선
>그대로 교도소에 직행한다이거지. 두번다신 출국할수없게되는거야, 재판까지도 못간채로말야.
>이런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서 자살한 백인여성은 꽤나 상당한 수라는 이야기지.
>단, 공주님의 경우는 조금 복잡한걸... 일본인이고말야.
>디스켓의 내용으로 짐작해보자면 , 공주님은 뭔가를 옮기고있는듯한데,
>약물이라던가, 그렇게 알기쉬운 물건은 아닌듯해.
>아무튼 하룻밤정도는 줬으면한다. 알수있는건 전부다 조사해볼테니.
역시 너는 박식하구나, 친구야. 하지만 왠지 즐겁지만은않은걸, 유쾌한 이야기를 네게서 듣고싶어했던건 아니지만말야.
514
그녀를 만나고서 몇번쨰로 맞이하는 아침인지는 기억나지않는다. 오전중엔 호텔을나가 둘이서 에비스역까지 걸어 나는 회사로, 그녀는 시부야로 돌아갔다.
서로가 돌아가는 길, [오늘밤은 늦을것같아요.]라고, 그렇게말한건 그녀쪽이었다. 어젯밤 선물로준상자를 절대로 잃어버리지말라며, 그리고 오늘밤도 그곳에 돌아와줬으면한다며. 그말을들은 나는 회사에서 죽어있는것과 마찬가지였다. 몸상태가 좋지않다며 회의를 제쳐놓고는 회사 근처에있는 공원에서 잠들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 친구가 문자와 메일을 보냈다는걸 확인했다. 친구는 하룻밤만 기다려달라고말했지만 내가 수신한 메일의내용에는 질문에맞는 답변이아닌, >내가 아무리 재빠르게 조사한다고 할지라도 하룻밤만으론 너무 촉박해, 그러니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라고, 이렇게 답장을 보내뒀다.
오후의 공원은 화창하기에 한가롭기만했다.
예전이라면 벤치에 멍하니 걸터앉아 한가로이 구름만 바라보는 샐러리맨을 이해할수없었다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과 완벽한 판박이다. 비둘기가 떼지어 모인뒤 날아오른채로, 머리위를 춤추듯 돈 뒤에 다시 땅으로 돌아온다. 말로는 다 표현하지못할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풍경 뒷면에는 어두막한 밤이 정확하게도 휘감아져가고있다. 이것이 세트와 같다. 라고들한다.
내가보기엔 이 현상 자체가 앞과뒤가 전혀다른 트럼프카드와 같다. 앞면은 틀에맞춘듯한 심심한만이 엿보이는 기하학적무늬. 뒷면은 초승달에 그려진 조커와도 같이말이다.
515
날이저물기전에 시부야에 향했다. 에비스와는 바로 옆이기도하니
마음만먹으면 걸어서도 호텔에 돌아가는게 가능하기도하다. 나는 세이부백화점의 1층플로어를 어슬렁거리며둘러보다가 눈이맞은 *미츠코겔랑을 하나 샀다. *향수 나무나도 호화스런 디자인의병이다. 제품설명서를 읽어보자, 생산년도부터 80년이고 경과했다고 적혀있었다. 이걸 공주님 나이에 사용하기엔 조금 이른걸지도... 한번이지만 공주님이 그런 병을 호텔의 세면대에있는 하수관에 흘려보냈던걸 본적이있다. 다른 여러 화장품에 섞여서말이다. 하지만 그런 광경이 눈에 들어온건 싫지만은않았다. 공주님이 그렇게끔, 자신의 주위에 흩뜨리는 풍경이말이다. 의자옆에 세워둔 부츠. 침대에 둔 코트와 미니스커트. 그중에서도 저번밤, 호텔을 어지럽힌 가방속 내용물이 인상적이었다. 분홍 해골이세겨진 플로피디스크. 지금에 이르러선 생각하는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그러니 걷자고생각했다. 느긋이 걸어봤자 공주님보다는 일찍 도착할것만같다. 포장을 열어, 세면대에 슬쩍 놔두자. 그러면 공주님은 무의식적으로 가방에 넣어줄지도 모른다.
로비로 내려가자 깜짝놀라고말았다. 로비의 소파에앉아 커피를 마시고있던 낯성 여성의정체는 공주님이었다. 그런 그녀를 못알아본 나는,
두리번거리다 등뒤를잡히고말아 옆구리를 손가락에 콕 하고찔리고말았다.
등뒤에 서있는 그녀, 머리는 짧게 잘려있었고 색은 좀더 밝아진 카라멜색이다. 일본인 여성의 검은눈동자가 보인다.
언제나의 컬러렌즈는 착용하지않았다. 아무리 분위기를 바꿨다고한들 예쁘기만한 그녀다.
우리들은 손을잡고 에비스의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역방면을 향하여 내려갔다. 라면을 먹으려 했던것임에도,어느 가게로갈지는 정해져있지않았다. 우리들은 느긋이걸으며 들어갈 가게를 찾아 거리를 서성였다.
아니지, 우리는 반대로 이걸 즐기고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당신말이에요, 왜 내 손을 잡아주는건가요?]라고 말하는그녀와
역을 지나 *다이칸야마로 간다. *시부야지명 차의 소음에 먹혀버린듯해 그녀의 말이 확실히 들리진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무얼 물으려했는건지는 안다.
나는 아무대답도않았다. 들리지않은척을했다. 입밖에 내자니 멋쩍고 쑥쓰러웠던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리를 내지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공주님이 머리를 만지는걸 허락해준 최초의 여자니까.
나를 필요로해준 최초의여성이니까.] 라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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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없이 발길만을따라 다이칸야마에 향하는도중. 친구가 메일을보내왔다. 짧은 단문메일이었다.
스크롤을 내릴필요없이 전문이 화면에 딱 들어올정도의 내용으로 이렇게 말이다.
>공주님을 붙잡아둬, 알겠지?
내일 일본을 떠나는 비행기에 절대로 태워선 안된다.
절대로 떠나게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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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보고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일의 답장따위를 기다려줄만한 위인이아니니말이다. 친구도 자신을 잘 알아주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단 두번의 수화음을 흘려보낸뒤, 친구의목소리가들려온다. 생각해보니 나와친구는 평소엔 별로 재잘대지않는다. 그렇게 잔뜩 회화를나눈다할지라도 그건 2바이트로 변환되니깐이다.
대량의 문자와 이미지데이터를 조사하고 건네주는 정보의파수꾼, 그와 통화하는 내가 들은 전화기너머의 목소리는 타인과같이 들렸다. 그렇기에 나는 이 남성의 목소리가 본인이라고 생각되기까지 도로위에 부는 강풍속에서 [ 너 내 친구맞아? ]라고 계속하여 외치지않으면 안됐다. 반복하는 내 질문에 답하는 친구의 한마디, 턱없이 짧다는건 알고있다.
그렇기에 나는 태클을 걸어야할지도모른다.
하지만 친구의 한마디를 듣고 아무말도 할수없었다. [에어인디아]*인도항공 라고 친구는 말했다.항공사 명이다. 내 귀를 통과하는 수많은 잡음속에서도 그부분만은 제대로 울려퍼졌다.
끊겼을지도 모르는길,탐색하기엔 턱없이 좁은길, 그속에서 친구는 기가막힌 천재적능력으로 최후엔탑승예약데이터 속에서 그녀의이름을 찾아내었다. 그렇게 말한뒤 [운이좋았어.] 라고 말했다.
우연히 항공회사의 데이터베이스에 줄이있는 녀석이 있었다며. 왠만하면 연락하는것만으로도 수일은 걸릴정도로 조심성이 많은 녀석이라고 말이다. 이 정보를 알아내기위해서 돈이라던갈 썼던거겠지.. 친구가 그걸 입밖으로 내진않았지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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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내게 [미안하다...]라고 친구는 한탄했다. 이 외엔 단 하나도 알지못했다면서.
[기억해? 3장의 gif파일 말야. 인도의 3곳의 거리와 자전거택시가 담겨진사진.
그 사진의 배경은 어느곳이고 전자상가가 밀집해있는곳이야.
일본으로치자면 아키하바라라고.
그곳들은 뒷골목에 들어가기만하면 윈도우를 2달러에 살수있어.
사진속의 그 장소가 골라진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거야. 하지만 그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어.
내가 말해줄수있는건 여기까지다, 미안하다.] 라고말한 친구의 한숨과같은 무언가를 내게 들려준다음 친구는 전화를 끊었다. 그걸듣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위해
인디아항공의 1개월간의 인도행 항공기좌석의예약상태를 찾아봤다. 그러자 그곳엔 공주님의 이름이 있었다. 공주님이 가명을 사용하지않은점을보면, 이걸로 나와의 이 서성임을 끝내려하고있는게 아닌가 싶기도하다. 물론 내가 말하고있는건 전부 추측일뿐이다.
하지만,
오늘밤 내가 잡고있는 이 손을 놓는다면 그녀는 이제 돌아오지않을것만같다는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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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괜찮아 친구야. 공주님은 여기있어. 내 손을 잡아주고있어. 눈을감으면 공주님의 체온을 느낄수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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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칸야마까지 걸어온 우리들은 가게를 찾으려하지않았다. 배가 고픈지조차도 알지못하게되었다. 어디에 들어가도좋고 먹지않아도 좋다며.이대로 길을 헤메는것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결국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진정시킨뒤
후레시니스버거에서나는 오렌지주스를 마셨고, 그녀는 후라이드포테토를 몇개만 집어먹었을뿐이었다. 아무래도 만나기 시작한 그날밤부터 감기기시작했던 밤은,
더이상 감길게없이, 완전히 감겨버린듯하다. 우리에겐 더이상의 시간이 남아있지않은듯했다. 그녀가 이젠 내가 알아채버린 그걸 말해주지않은채로
애써서 밝게 행동하며, 날 위해 농담도 건넨다. 그런 그녀는 호텔에 돌아와서도, 내곁에서 떨어지지않고 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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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내리깔린 어둠. 그 어둠속에서 그녀는 짐을꾸리기 시작했다. 세면대에 있던 화장품을 모아 정리한후 백에 넣어가져온 어딘가의 샵의 봉투에서새 원피스를 꺼내어 갈아입고 PC를 켜고선 짧은 메일을 송신했다. 그 뒤 우리들은 침대에 누워 잠시간의 잠을 청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불던 파도가 , 조금의 바람도 불지않은 상태가되어
잔잔한 수면이된다 이젠 잔물결이 하나도 치지않아 완전한 거울과도 같아진다. 그것에 닿은 순간,나는 이젠 아무말도 할수없게되었다.
그녀는[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지금은 진정되어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며.
새벽.
그녀는 호텔방에서 떠났다. 푹신푹신한 융단탓에 발소리조차없이. 그녀는 요정처럼 내 앞에서 사라져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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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남기고간 기념품상자를 열어봤다. 화려하게 극채색된 꽃이그려져척봐도 인도의 토산품같아보이는 향이나는 상자다. 상자속은 텅 비어있었다. 상자속에 대신 들어있던건 분홍색 곰인형이었다. 상자의 덮개를 열때 , 향수의 향기가 사악하고 퍼졌기에 나는 그 향기를 폐속에 가득 차도록 크게 들이쉬었다. 벌써부터 그리워지기만하는 향기. 그건 그날밤, 그녀의 목덜미에 남아있던 그 향기와 같은것이었다.
그녀가 돌아왔을때,
나는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고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낮게 드리워진 회색빛 구름이 풍경에 한결같이 빛을 뿌리고있었기에 경치는 원근감이없는, 한장의 사진처럼보였다. 사진의 오른쪽끝에는 역으로 향하는 길이 있으며,
이 도로는 도로위를 어지럽힌듯이 보이는 민가쪽으로 쭉 뻗어있기에,
이곳에서 본다면 사라지는듯이 보이는 길이다. 공주님은 그 길을 걷고있었다.
공주님은 돌연히, 사진속에 모습을 나타냈다. 제법 거리를 두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과같이 보이는 이동하는 무엇인가가 공주님이라는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길을따라 느긋하게 걷는 공주님. 걷고있을떄 정면을 바라보지않는 버릇이있어, 조금 염려스럽기만하다. 나는 길 모퉁이의 나무나 꽃들에 전혀 흥미가없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생각하기에 「귀여운것」을 찾으면서 걷는 버릇.
이 버릇이 내겐 못마땅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걷고있는 그녀의 오른손엔 하얀 편의점봉투가 쥐어져있었다.
봉투속엔 과일같은 무언가가 담겨져,딱 그정도의 무게에 앞뒤로 흔들리고있었다. 커튼을 닫는다.
CD를 트레이에 얹고서 재생한다. 그리고선 침대에 기어들어간다. 이불에서 머리를 꺼내어 크게 호흡하자 목에서 풀무에서 나는 소리와 썩다를바없는 흐윽 거리는 소리를 내온다. hiroshima.tistory. 확실히 나른하다. 하지만 심장은 크게도 두근거리고있었다. 감기때문이 아니란건 안다.
이제곧 공주님이 이곳에 오기떄문이다. 병원의 할아버지가 말했었던건 옳은 판단이었다. 지금은 39도에 도달한듯한 열도, 나는 잊고만 있었다. 나는 건강체 그 자체라고말이다.
걸을때 조금 휘청거릴뿐인..
일초라도 빨리 공주님의 얼굴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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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쁜듯한 높은톤의 목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진다. 조금지나자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건 분명, 오른손에 늘어뜨리고있던 편의점봉투가 내는 소리겠지.
레드핫 칠리페퍼스의 ScarTissue,
곡이 끝나기전 수십초간 애절한 기타의소리가 계단의 발소리와 겹쳐진다. 언젠가 MTV에서 본, 그 영상을 떠올려냈다. 황야를 질주하는 너덜거리는 오픈카와 넥이 끊긴 기타. 연주자는 연주가 끝자나, 아무런 망설임도없이. 기타를 주행중인 차에서 뒷쪽으로,
수면에 흘리듯이 버리고만다.
쓸데없이 멋진 마무리다. 그걸본 나는 나라도 무언가의,
매사의 마무리에 있어선그정도로 멋있게 정할수 있을거라며, 그럴수있을거라며 믿고있었다.
[다녀왔어요.]
하지만 어떨까.
그녀와의, 최후의 순간에 나는, 제대로 설수는 있으려나?
[제대로 자고있던거 맞죠?]
시원스레 '안녕' 이라고 말할수는 있을까?
[저기저기, 이것좀 봐요]
그런건 분명히... 할수없다.
있을수없다.
[귤과 사과를 잔뜩 사왔어요, 엄청 쌌다구요?]
그녀의 디스켓이, 언젠가 그녀를 삼켜버리진 않을까하며, 나는 역시나 불안하여 어쩔수가없다. 그렇기에 병원에서 들었던 그녀의 작은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주술의 주문처럼 읊어졌지만,
그 주문은 아무런 효과없이 머리속을 내돌기만했다.
[아, 과도랑 접시를 가져올게요] hiroshima.tistory.
이제, 나도 머릿속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될것같다.
지나친 생각일테다. 감기탓에 마음이 약해지고있는걸거야.
아마, 그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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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정도로 숙달된 손놀림으로 그녀는 사과껍질을 벗겼다. 왼손에 있는 사과가 빙글빙글 회전하며, 얇게, 붉은껍질을 벗겨져간다. 그녀는 왼손에서 사과를 놓지않고 네등분으로 나눴다. 나이프로. 씨로 막힐법한 부분까지 간단히 싹둑하고 잘라냈다. 조금 큰, 네등분된 한조각이 내 입언저리에 옮겨졌다. 사과는 차가웠기에 상쾌감이 입안에 퍼진다.
맛은 별로 느껴지지않았지만, 침샘관이 한가득 열리며산미가 있다는걸 알려줬다. 그새 그녀도 한조각을 입에물고서 오물거리고있었다.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를 내는채로[맛있어요?] 라고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졸음이 몰려온다. 그녀가 곁에있으면 안심되기에 졸음이 몰려온다. 내가 눈을감고 호흡을 낮게쉬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자려고 했을때. 그녀는 평소와달리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이리 말했다.
[내일부턴 잠깐동안 만나지 못할지도몰라요. 짧은 시일내로 , 금방 돌아올게요.
일본에 돌아오면, 제일먼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 그녀는 입을닫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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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돌아온다면...
친구의 메일을 생각해냈다.
분명히 공주님은 인도에 떠날 예정이다고했다. 만약 그리된다면, 나는 명탐정과 한패가 된다. 디스켓에서 몽땅 다운로드된 알수없는 데이터 속에서. 이와같은 답을 추론해낸 친구. 친구야, 너는 명탐정이었던것같다.
그녀는 해가 떨어지기전에 돌아갔다. 아쉬운듯이 긴 시간을 들여 코트를입고서. 한동안 내 뺨에 머리를 붙대어주었다.
그런채로[돌아올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라고 그녀는말했다. 그녀에게 내 감기가 옮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아아...인도는 더웠던가?
그녀가 없어진 뒤의 어둠. 나는 그 안에서 단지 누워있을수만은 없었다. PC를 기동시켜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보낸다고해서 무엇이 된다고하는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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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없는 밤. 나는 방에서 한발짝도 내딛지않았다. CD케이스더미에서 적당한걸한장잡아채고서 재생해본다.
하지만 무얼 재생해봐도,
몇번이고 cd를 바꾸어봐도 기분이풀리지 않았다. 나는 카드점이라도 치는듯이 CD를 꺼내어 CD들을 탑을쌓듯 쌓으며, 매일,매일간 음악을 재생했다. 이런경험, 누구에게나 있는게 아닐까? 있을리없는 미래를 점치는 이런 일들을. 강변에서 자갈을 주워,
과녁삼아 노린 바위에 제대로 명중될경우엔 혼자서 끙끙앓는 짝사랑이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하지만 내 손끝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들리는 노래도 어느곡이고 시끄럽기만, 잔잔하기만했다. 그런 노래를 내 뇌하수체가 망가진듯이 소리를 계속 먹어치우고있었다. 절대로 가시지않을 굶주림이 들린것처럼말이다,
게다가 내게는 그녀가 돌아오지않을거라는 불안이 자리하고있었다. 그런 내가 열과 좋지않은 몸상태를 어떻게든 억누르고서 회사에 얼굴을 내비친건, 그녀에대해서 죄다 잊고싶었으니까다.
아침,
할아버지가있는 병원에 가서[안정을 취하거라]라는 말을받으려하자. 할아버지는 내게 공주님의 얼굴이보고싶다고 말했다.
[혼자서 독차지하지만말고, 앞날이 얼마남지않은 늙은이에게도 보여다오.] 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말을듣곤 우울해지고말았다. 그래서 이렇게 출근해있다.
이 할아범탱이...
이상하게도 일에 몰두하고있자 몸상태가 좋아지는듯한 느낌이들었다. 실제로 열도 오후엔 미열로내려가 잠잠해졌었고.
삐걱대며 통증을 몰고오던관절과 예민해졌던 촉각이 무뎌졌다. 그리고 몇일이 지났을쯤엔, 전혀 아무렇지도않게되어 할아버지에겐 확실히 나았다며 보증까지 받게되었다. 하지만 밤에 홀로있자 울적함이 찾아왔다. 그런 밤이 계속되어 소리를 먹는것에 질리자,
나는 시체가된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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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메일이 내게 전달되었을때는 확실히 그쯤이었다고 생각한다. 괴로웠던 체열도 가시는, 컨디션이 서서히 회복을 시작했을 무렵,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있을때. 나는 동료에게서 걸려온 연락이라고 착각하고서, 한동안 휴대폰을 내버려 뒀었다.
하지만 발신자는 친구였었다.
친구의 메일은 길었다. 분명히 오래간 사귀어온 지금까지 받아온 메일중엔 가장 길었다.
친구는 공주님이 인도에 떠난건 유감이다.로 시작하여 내 수중에있는 데이터로는 이제 아무것도 알아낼수가 없었다. 는 끝마침이었다. 그 와중에도, 친구나름대로 나를 위로해주려고하는 노력이 엿보이는 문장들. 이제 괜찮아, 친구.
크리스마스 이브날밤,
나는 데이트대행업체의 여자를 샀던적이있다. 섹스는 하지않는다는 조건한정이었지만, 우리둘은 한순간에 의기투합하고서, 불문율의 한 선을 시원스레 뛰어넘었다. 공주님이 왜 나따위를 맘에 들어한건지. 지금이 되어서도 알진못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몇시간 후, 호텔의 한 방에 있을정도의 사이가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를 본뒤,
공주님은 내게 한장의 카드를주었다. 명함 이라기보다는 전화번호와 메일주소가 적혀있는, 단순한 인포메이션카드. 싸보이는 연한 카키색의, 머메이드지. 간단하게 복사기로 직접 만들어낸듯한 검은 잉크가 인쇄된 자리를 손톱으로 세게 긁자. 벗겨진 토너가 가루가되어 떨어진다. 이 카드는 내 지갑의 카드홀더에 박힌채로 있었다. 완전히 잊고있었다. 곧바로 카드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수화음에 때때로 신호가 좋지않아 내는 탁한전파음이 섞여나올뿐, 아무도 받지않는다. 날을 새로 잡아 전화를 걸어봐도 결과는 같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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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상하다...
카드에는가게명도 적혀있지않다. 나는 공주님의 정체를 밝혀내고싶은건 아니다. 하지만 공주님의 흔적을 뒤쫓지않으면 진정되질않는다. 공주님은 만나고싶어진다면 이 번호로 전화해줘요. 라고 말했다. 이 번호를 가게번호라고 멋대로 생각했던건 내쪽이잖은가.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가동해나가는 공주님의 디스켓전용 PC와도 같이,
이 번호가 공주님의 전용번호란말인게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내 추리는 올바른 결과를 내지못한채로 언제고 꺾여버리고만다.
공주님은 부유한데도 왜 나따위와 놀고있는걸까. 친구는 공주님이 부자라고 말하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고 하곤, 그 돈은 공주님의 그림자일지도 모른다면서 그 세계의 신용에 이루어진것과같이,
그녀를 뒤따르는 그 돈은 없는것과 별반다를게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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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생각을하며 침대에 눕자 문득 떠오르는건, 그 채팅방에 대한것이었다. 음악계의BBS와 채팅으로 구성된 꽤나 적당적당한, 어딘가의 카페식 사이트. 이 클럽은 심심풀이삼아 들른뒤, 곧바로 나갈생각이었으나. 어떻게된일인지 동이틀때까지 거기서 체류하게되는 자신이 모니터에 비춰지고있었다. 몇명인가의 여자애들과 잡담하며 멍하게 있다가. 슬슬 나가볼까 하던참에, 나는 특이한 닉네임을 발견했다. 이름은[질식할것같아] 프로필메세지는 [평범하게 얘기해줄사람 희망] 단지 그뿐인 문자가 묘하게 걸렸기에, 나는 로그인했다. 달리 적혀있는건 꽤나 과격(?)하게도
[오늘밤 함께있어줄 남자?]따위와,
노골적으로 하룻밤을 지내는데 드는 비용까지 표시되어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곳은 풍속녀가 대기하며 사용하는 사이트라는듯하다. 그렇다면 클럽주인장이 내건 '음악계'사이트라는건 사이버경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인가? 아니,클럽자체가 진실된 음악계일지는 모를지언정 이곳의 단골들은 풍속녀와 그 찌라시등의 상업적인 문자를 나열하기 위한자들의 쉼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이곳에 들어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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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기서 찾아낸건 시부야의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멀리 사라져 버린듯 보일정도로 아름다운 공주님이었다. 무료기도했으니, 세시간정도를 주절댔으려나? 그러다 정신을차리고보니 동이 터오르기 시작했기에, 채팅으로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기 직전, 우리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데이트를 약속했다.
물론, 유료로. 그런 공주님이 내 일회용메일주소에 사진을 보내왔을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기쁘다. 라고 하기보단, 나를 놀리고 있다고생각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렇기에 나가지말까...하는 생각에 혹하기도했었다.
당일.
나는 태연히 집을나섰고, 공주님을 발견해낸뒤,
기쁜나머지 방방뛰었다. 그러면서도 [이건 유료라고!] 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렇게 예쁜사람과 데이트를 한다고해도 너는 손끝하나 못 건드려!] 라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고양된기분은, 그런말로는 가라앉지않는다. 전화방등의 약속따위의 성공률은 약2할도 되지않는다고 들었던적이있다.
만약 전화방의 상대와 만난후 상대에게 만족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이 확률은 더욱더 급하강을 보이며 낮아지겠지.
그러니 이 확률이 정확하다고한다면,
나는 기적과 조우한케이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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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회사와의 업무회의를 끝마친뒤, 회사에 돌아가기전에 홀로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사들곤 HMV라거나 타워레코드를 서성이러간다. *둘다 시부야의 레코스숍 학생일적엔 중고CD숍에서 끈덕지게 들이박혀선 월50장 쯤을 사들인적도 있다. 몇년이고 그 행위를 반복하게된다면,매월 몇백장을사던,1장만을 사던 좋아하는 노래의 절대량에는 변화가 없다는걸 깨달았다.
일을 시작하자, 내가 서성이는 장소는 타워레코드 등의 대형점포에 한정된듯이 되어있었다. 갖고싶은 새앨범들은 발매일부터해서 수일이내에 사곤했으니서성이러 갔다고하는건 정말이다. 그럴때 사들이는건 좀처럼 없다지만, 내 방에 자리한 CD들의양은 날이다르게 팽창하는 버릇이있다. 사들이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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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밑과 옷장이나 벽장등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는듯이 CD들이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그곳엔, 이제 절대로 들을리없는CD들이,정리되지않은채로 쑤셔넣어져있다. 오늘밤도 그 폐기처분이 결정된채인 CD더미속에서 한장을 골라 재생한다. 산 기억조차 나질않는 CD. 처음으로 듣는 소리다. 그렇게 몇밤을 보낸걸까.
주님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었던게 현실적이지 않게되었고 공주님의 부드러운 피부의감촉이나, 머리에서나는 향기. 그런 기억의파편들을 떠올려내는게 어려워졌을때쯤. 공주님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장소는 공항에딸린 카페라고한다.
방에서 재생되는 배경음이 들리지않게끔, 무서울정도로 고요하게 된듯하다.
그런 방에 멍하게 앉아있는 내게 , 공주님의 목소리가 뚜렷이 , 귀에 울린다. 나는 CD의 재생을 멈췄다.
늦은시간. 공주님이 흔들어깨운탓에 눈을떴다. 마지막 날인데 몸은 전혀.. 내 뜻대로 따라주질않는다. 열은 꽤나 내려간듯한데 졸음이 쏟아져왔다. 그녀가 편의점에서 사준 스프와 빵을 긴 시간을들여 먹고서,
[고마워, 이젠 돌아가봐도돼] 라고 말했다. 즐거웠던 새해의 수일간,
이제 충분하다. 이 이상을 붙잡는것도 구차할뿐이라며 자위했다. 오후도 잠만자며 보낼뿐일테니라고 생각했으니 이렇게 말하는건 당연하다. 그녀는 내 말을들은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단지 내 손에서 빵 포장지를 버리고선 다 마시지못한 스프를 치워주었다.
그뒤 그녀는 옷을벗고 침대로 쑥하고 들어왔다.
싸늘한 그녀의 피부.시트의 스윽 거리는 소리.
긴 머리가, 귀여운 가슴에 늘어져 펄렁이며 흔들렸다.
사랑스럽게만 보이는 공주님이 내 옆에누워 나를 바라보곤
[안 잤으니깐, 잘거에요.] 라고, 그렇게 말했다.
오후부턴 비가내리기시작했다. 호텔의 객실은 아무런 소리없이. 오후의 미술실같은 차가운 정적만이 있었다. 사이드 테이블 위의 시계의 초침만이. 모터가 들어있는 유리막 안에서 빙빙 돌았다. 오후1시를 지났을쯤,
나는 그녀의 寢息(침식)을 들었다.
내 기억은 거기서 끊어져있다. 이 뒤로 남은기억이라곤 얕은잠 속에서 본 꿈.
아시아 어딘가의 거리와. 한장의 플로피디스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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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안에서 눈을떴을때.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벽장속에도,욕실에도. 그녀가 여기에 있었던 흔적조차도 사라져있었다. 화장대 위에 널부러져있던 화장품도 침대 주변에있던 봉투더미도, 죄다 갑작스레 이 방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전원이켜져 대기화면이 된채인 노트북과 사이드테이블에있던 한장의메모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휘청이며 화장실을 들린뒤 냉장고에서 페리에를 꺼내어 벌컥이며 마셨다. 급히 마신탓에 코로 역류하여, 기침이 멈추질않았다.
그리고 어느샌가 잠에 들었다.
얕은잠을 잔 뒤,
해가진뒤로 열이 몸속을 다시 부글부글 끓였기에 일어났다. 마치 몸이 불탈정도로 뜨거웠다.
몸이 몹시 나른하고, 철과같이 무거웠다.
마치 관절이 삐걱대는것만 같았다. 힘겹게 침대옆 취침등의 스위치에손을뻗어 어떻게 불을 킬수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위에 남겨진 메모에 눈을 돌리자 메모엔 달필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아직 열이 나는걸까요?
조금 걱정이에요.
그러니 곰인형을 두고갈게요.
곰인형이 당신을 지켜줄거에요.
이 곰인형은 내 목숨보다 소중하니까,
그러니까.. 다시 내게 전화해서,
꼭 내게 돌려주세요.
공주님의 천진난만한 몸짓이나. 얇고색기있는 목소리나. 아름다운 용모에 속아넘어가 중요한점을 잊고있었다.
똑똑한 여자다,공주님은.
그러자 객실의 전화가울리며 프론트에서 손님이 왔다며 알려주었다. 오후10시를 지났을무렵이다. 방으로 친구가 들어왔을때,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콧물을 늘어뜨리고있었다. 미처 닦아낼 기력도없었다.
[사람 귀찮게스리...]
친구는 들어오자마자 그렇게말했다.
그렇지만 그말속에는 책망도,꾸짖음도 들어있지않았다. 나는 무슨 상황인지도모르면서도 미안해라며, 몇번이고 사과했다. 친구는 밖으로 나오는걸 싫어한다. 하지만 이곳까지, 멀리떨어진곳까지 찾아와줬다,
나를 위해서.
친구는 차를 갖고있는 폐인이다. 폐차직전의 자가용. 나는 그 조수석에 앉아 계속해서 콧물을 늘어뜨리고있었다. 차가 깜빡이를 켜고서 어딘가의 교차점을 돌고있을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전언철회다. 네 공주님은 장난이아냐,
그러니 너한테 그 공주님은 어울리지않지. 그러니 이젠 손도 대지마.
호텔의 정산도 묘하게 끝마쳐놨고 보냈던 메일은 정중하면서도,
용건 이외엔 토씨하나 안달릴정도로 간결했어.
문장마저 흠잡을곳이 한곳도 없었고말야.
네가아닌 그녀쪽에서 내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는건,
어떻게 봐도 우리들이 했던말을 알아챘다는말도 된다 이거지.
...단지 위험한 일을하는,얼굴만 반반한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야...
더 깊이 관여하다간 깔끔한 결말을 기대하긴 어려울것같다.
이제 관둬, 친구니까 하는말이다 친구를 믿어.]
라며, 그러니 꺠끗하게 잊어버리라며 말했다.
친구는 내가 공주님을 감당할수없다고 말했다. 그걸듣고 나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대로 흐느껴울었다.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네 말을 들을순없어.
난 그녀를 사랑하고있어,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말야 ...
그리고 나는 차가 집으로 도착하기전에 토했다. 조수석의 시트에 속에 들어있던 전부를 게워내듯 토했음에도,
친구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친구는 묵묵히 창을 열고선,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내 손에 쥐어진 분홍색 곰인형 인형에 코를대자 역시나 향기가 난다.
넌 이 곰인형이 나를 지켜준다고했지만 그게 아냐,
내가 이 곰인형이야. 네게 돌아가고싶어서,
가슴이 터질것만같은데, 나는 언제고, 1초에도 수번을 너만 생각하고있는데. 네 가슴이야말로 내가 있을장소인데..
674
7일째 아침.
몸이 무겁고 괴롭다.
내방 침대에서 기어나온게 기적적이었다.
또 언제나처럼 하얀셔츠에 손을넣고선
넥타이를 졸라맬뿐인 매일의 시작. 삑삑거리는 체온계를 보니 간당간당39도를 보이고있었다.
최악의 스타트다.
집에서 처량하게끔 열내봤자니
아무일없다는듯 현관을열고, 늘 보아온 상점가를 빠져나와 역을 향한다. 내 행로의 반대편에선 여고생들이 재잘대며 다가온다.
공주님과 몇살 차이가나지않는 여자애들이다.
아주조금, 인생의 나사가 어긋났을뿐인데, 저 여고생들처럼은 웃을수없게된 공주님.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잔돈을 자판기에 쑤셔넣고선 적당한 버튼을 주먹으로 쳤다.
나온건 한마디로 어느회사의 어떤상품을 고르더라도 큰 차이가없는맛의 캔커피. 그런 캔커피와는 달리 나는 우연히,
평범과는 먼, 스페셜한 여자와 만났다.
이름은 리카, 케이코이기도하며, 공주님이다. 동시에, 그 무엇과도 다른
내가 알지못하는 여성.
이따금 선로가 끼어있는 건널목엔 진입차단로가 내려오고,
바퀴가 달린 철로된 큰 상자도 몇개고 지나간다. 도심으로 향하는 인간전용 콘테이너. 그 매일의 여로들을 합치면 분명히 달보다 멀겠지. 그리고 나는 그 여로의 도중에서 공주님을 찾아냈다.
공주님은 선로의 옆을 도보로 나아가는 난민이다. 빛바랜 봉제인형만이 유일한 동반자인... 작은 돌에 발이걸린것만으로도 끝날것만같은 위험한 여행. 그리고 그여행의 동반자는 지금 내 검은가죽의 사각 가방속에있고, 본 주인의 따뜻한 손으로 돌아가는걸 절망(切望)하고있다. 이 동반자는 자신이 있을곳은 공주님의 뒤좁은 가방속이라고 확신하고있다.
어젯밤,
홀연히 사라져 없어져버린 공주님. 왜 내 손에 곰인형을 남긴걸까? 막연한 생각이 떠오르다 사라지지만,
지금, 내 열에 녹아버리고만 머리는 그런 생각조차 붙잡질 못한다.
그러던중 전차가 역에 스윽하고 들어온다,
나는 여고생들과 함께 그 전차안으로 넣어진다. 경량 스테인레스와 폴리카보네이트의 무기질로된 통. 그 안에서 나는 자신인척을하며 호흡하는 다른 무언가다. 넥타이 모드에 딱 들어맞는게 되는 자신을, 나는 자랑스레 여기지만. 친구의 싸늘한 시선을 당당히 받아들이질 못한다.
어쩌면, 애처롭다 생각되는건 내쪽일지도 모른다. 변화를 싫어한다며 묵묵히 살아온 나. 그때, 내버려졌을떄 ,
나는 곰인형을 쥔채로 흐느끼는것밖엔 할수없었다. 그 여름의 공주님처럼. 그 겨울에 유일히 그녀를 지탱해줬던 남동생에게,
버림받은듯 외톨이가된 공주님처럼.
675
출근해서 동료와 손뼉을 치고서 새해복 많이받으라며 덕담을 주고받고 책상에앉아 PC를 켠다. 단 1주일전에도, 나는 이곳에있었다. 하지만 그 날을 아드막히 느끼고있다. 분명 공주님으로부터 영업메일이 왔던 날이다.
그날은,
연말인데도 귀찮은 일이 한가지 있었고,
말일부터 날짜가 변경되어 신년이 될때까지 동료들과 끈덕지게 붙어있던 날이다.
그리고 그 흔적이 모니터에 나타난다. 근무중에 벌인 딴짓이 아니게 보일정도로 멋지게끔.
누구라도 일에있어서의 정밀한 톱니바퀴가되는건어렵다.
그 곤란함의 이력이다 이건. 나는 손끝으로 업데이트된 메일들을 찾는다. 그러고선 등뒤에 서있는 키큰남자와 소리없이 웃음을 주고받았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우리들의 노력은 보답받으며, 만사가 순조롭다. 그런고로 나는 돌아가기로했다.
뭐가 어떻든, 곧바로 전차에오른뒤 집에도착해 따뜻한 내방의 침대위에서 자려했다. 신뢰할수있는 동료의 메일주소에, 조퇴의 변경을 적은 짧은 메일을 송신했을쯤이려나. 휴대폰의 진동과함꼐 메일을 수신했다.
> 곰인형 돌려주세요. > 전화하라는 메모 남겨뒀잖아요.
공주님에게서였다. 가슴이 뜨뜻미지근하게 한번 두근거리는 뜀박질을 보였다.
이 뜀박질은 소름을 동반했고, 소름은 내 사지 저끝까지 내달렸다.
계속해서 또 한통.
> 현재 데이트대행 미소녀 무료 캠페인중이에요. > 1분이내에 답장해준 당신에겐 미소녀와함께 꼭~붙어잘수있는 특전을 드려요.
> 보고싶어요.
메일을 수신한지 30초쯤을 지난 초침이 기계음을 낼때쯤 공주님께 답장을보냈다.
[만나고싶어.]
라고만 보낸뒤 장소를 추신했다. 미소녀라는 미묘한 표기에대해선 함구한채로. 플로피디스크에 대한것도있으니.
676
집근처 전철역의 카페,
공주님은 개찰구를 통과하는탑승객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 공주님을보고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나. 그녀는 서둘리 내게 달려와선 내 이마에 손을 얹곤 얼굴을 찌푸렸다.
[열이있네요. 전혀 낫질않았어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슈퍼에 들렸다 가겠다고 말하고선 택시를 붙잡아 나를 밀어넣었다. 감기도 이렇게까지 심하면 걷는것조차도 괴롭다.
그녀는 그날,
디스켓에 대한말은 일절 하지않았다. 나또한 거북함을 느꼈지만 역시.. 말할수없었다. 내가 말하면, 그녀의 만져선 안될 무언가가 내 탓에 흘러넘쳐 버릴듯했기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내 탓으로 망가져버리고 흘러넘쳐 결국은 없어질테니까...
그렇지만 그 무언가가 그녀에게있어선 터무니없이 말하기어렵다는것이란건 어렷품이 알아차렸다. 그녀 스스로, 옛날이야기의 최초의 시작을 어떻게 다뤄야할지에대한게 무척이나 어렵고 힘겨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보는 나는 어떻게된건지 죄의식은 별달리 느껴지지않았다. 혹시, 나는 그녀의 입에서 일의 진상을, 자초지종을 듣고싶어했던거였을지도 모른다.
도쿄에서 보냈던 밤,
바닥을 뒹구며 만진 매끈한 그녀의 등이보인다. 그 등을본 나는 이 일에서 서둘러 도망치듯, 그녀의 가녀린 팔을 잡았다.
그날밤부터다,
나는 사실 알고있었다.
어렷품이 헤아리고있었다.
나와 공주님을 이렇게 까지 고뇌하게만드는,
그 무엇은 내게있어서 너무 무겁기만 할뿐이라는걸. 그리고 그녀에게있어서도...
하지만 나는 스스로 그무엇인가를 부트해버리고말았다.
어디선가 딱하는 소리가난뒤,
보이지않는 서보모터가 조용히 작동을 시작해, 긴밤을 감아만간다. 당연하다싶이, 이 밤을 멈추어줄 정지스위치따위는 없다.
기계는 밤이 감아져가며 없어져버릴때까지, 작동을 멈추지않는다. 그때, 그 밤에 나는 어디서 무얼하고있을까?
아마도..적어도 공주님은 내 곁에는 없을거란 생각이든다. 머리가 아팠다.
열은 심하게 올라만간다.
택시가 본적있는 큰 쇼핑몰의 입구에서 조금 선회한뒤,
브레이크를 밟아 떨고선 뚝하고 멈춘다.
공주님은 날위해 레몬과 벌꿀, 그리고 무슨 잡화들을 봉투에 담고서 돌아왔다. 그런 공주님의 한손에는 쇼트케이크의 작은상자가 있었다. [이전엔 빈손이었으니깐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가방에서 곰인형을 꺼내들어
양손으로 잡은뒤 곰의 머리를 꾸벅하고 숙인뒤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의 배려에는, 제대로 감사하지않아선 안된다.
그녀는 곰인형의 머리를보곤 웃었다. 새로운모자, 펩시의 뚜껑이다. 이 곰인형은 제대로된 모자 수집가가 되어가고있다.
751
택시가 현관앞에서 차체를 바짝 대고서 멈추자, 엄마가 발을 동동구르며 기다리고있던것처럼 현관에서 나오셨다. 마치 내 귀가를 전부 꿰차고있던것만같다. 어떻게 안걸까?
아마 이 상황에대해 어리둥절한듯한 얼굴을 하고있었겠지.
그런 날 보고서 공주님은
[어머님께 전화로 연락해뒀어요.]라고 그녀는 말했고 [또 갑작스레 방문할수는 없었으니깐요.]
[서로 마찬가지잖아요.] 라고, 그녀는 무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미소가 가시면 굉장히 차갑게보인다. 그런 얼굴로, 그녀는 내가 본 플로피디스켓에대해서 넌지시 내비쳤다. [당신의 수첩과 휴대폰데이터는 전부 봤어요.]
[당신의 주소와 회사의주소, 친구군의 주소및 그 외 주소전부를 봤어요.
중요한것들은 전부 내 메모리로 옮겨두었구요.]
진짠가요? 그러면, 내 즐겨찾기에 등록된 팬티도촬사이트도 들켰단거고. 라는건, 사실 교복미니스커트에 환장한다는것도 들켰단걸텐데. 아마 술자리에서 알아냈던,
도촬사이트 URL을 기뻐하며 메모장에 직접 1페이지에 큼지막하게 썼을텐데...
이 공주님이라면 URL을 전부다 한번쯤은 열어봤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친구야,
미안하다.
네 실명까지 알려져버렸어.
나는 꾸지람들은 아이처럼, 군소리없이 가만히 있을수밖에없었다. 그런 나는 곰인형을 손에 쥔채이기에...
한층더 얼간이처럼보였을테지.. 그런꼴인 나를본 엄마의 잔소리가 내 발목을 묶어붙들기전에,
2층에있는 내 방으로 내달렸다. 공주님도 그걸 알고서, 엄마의 주의를 제게모은뒤, 어느샌가 둘은 주방으로 사라져있었다.
방으로 도착해 셔츠를 벗어던지고,
넥타이를 풀어헤친뒤 유니클로의 스웨터로 갈아입는다. 그뒤 커튼을 열어젖히자,
잿빛덩어리인 구름들에 투과된 빛이 방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채광하나로도 환하기그지없는 방이 된다.
맑게 개인날의 햇살은 방에 어두운그림자를 만든다. 그렇기에 오히려 구름낀날에 방이 밝다. 골고루퍼진 이 빛 속의 방은 너무나도 밋밋해보인다. 이 방은아무런 볼거리도없다.
개성의 한 조각도 찾아볼수없는,
일에 치이는 독신남의 방이다.
쓰잘데기없이 산처럼쌓여있는 음악CD와
잔뜩있는 잡지에대해 나는. 음악에 조예가 깊다고 말하기보단 충동적인 잠시간의 취미였다. 라고 해야한다. 오히려 이것들은 장르와는 맞지않게 물건 자체에서 오타쿠냄새가 풀풀 풍기는듯이 보인다.
그렇게 바라보다 침대에 기어들어가자 나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빠져들며 밑층에서 공주님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얇고 높은데도, 조금도 시끄럽지않은,
자장가로는 최적의 음역이다. 그 자장가에는 확실히,나를 감싸안고선 안정되게해주는 마법과도같은 힘이있었다. 수면까지의 도입을 재촉하는,
볕의 냄새와도 닮은듯한... 안심감이 있었다.
752
땀을 흘리고있었다. 저녁밥을 가져와준 그녀의 기척에 눈을떴을때, 이불속은 완전히 병실에 누운 병자의 그것과도같은 냄새만이 한가득 차있었다. 그녀는 내 가슴에 서늘하며 차가운 손끝을 대곤
[가엽네요.] 라고 말했다. [미안해요. 오늘밤은 쭉, 같이있어줄게요] 라고말했다.
미안해요 라고 사과하는건,
요코스가의 밤에대한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들었을때, 나는 그녀가 요코스가에 방문했던걸 역시 틀림없이 후회하지않고서, 만족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여기에 있어요.]
[당신의 곁에있어요.] 그런 의미이려나? 하고 생각했다. 본의를 파악하지못해, 의아스레여겼던 공주님을 바라보자, 자연스레 눈이맞았다. 부드러운데도 왠지모르게 화내는듯한 느낌도 든다.
컬러 콘텍트렌즈도 아닐텐데 희미하게 갈색빛이 섞인 큰 눈동자. 이 눈동자는... 내가 모르는 풍경을 잔뜩 비춰왔겠지.
시부야 변두리의 드럼통과 모닥불에 타오르는, 여러 욕망의광채. 홍채에 새겨진 잔혹한풍경들에게서 눈을 닫아 도망치는것조차도 불가능했던 공주님... 그때의 공주님은 그 전부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렸다고 생각한다.
흐느낌과 낙담만으로 몇개의 밤을 보내왔던걸까. 지금도 돌아갈 집마저없는 공주님. 공주님은 언제고, [집에는 돌아가고싶지않아요.] 라고 말했다. 그걸 실행에 옮기기위해선 어리기만한 여자아이가 실행할 선택지는 많지않다. 기껏해야 한손에 꼽을수있을정도일테지.
공주님의 눈동자속의 나른히 보이는 풍경. 네온사인과, 그 불빛에 가라앉은 시부야의 거리. 그걸보곤 잘 생각해봐. 라고 나는 내게 말했다.
분명히 나와 함께 잠들었던 그녀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있었던 나는 다른 누구와 다를게없다. 나만이 특별한게 아니다. 나는 돈을 지불하고서 기분이 풀릴때까지, 그녀를 시부야의 밤속에 붙들어 매려하고있었다.
다른 누구와 다를바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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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의 하얀 스푼을쥔 공주님이 더욱 어린애같이만보여서 공주님이 그걸 손에쥐었을때, 나는
[스스로 먹을게.]라고 말했다.
쑥스러웠다. 그러나 일어나는건 귀찮았으며, 솔직히말해 식욕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공주님이 기껏 만들어준 죽이라면 먹어야했다. 무리해서라도 남김없이 먹어야한다.
어느샌가 난로에 불이 들어와있어, 방은 따뜻했다. 그녀는 내곁에서 내가죽을 먹는동안 어떻게 만들었는지와 조금 궁리해서 만들었다던가. 엄마와 여러 이야기를 했었다던가와같은 두서없는 이야길 했다. 그 사이, 흥미가 방에 쌓여있는 CD에 향해져선 그 뭉텅이속의한장을 꺼내들곤 [한장, 빌려도 괜찮을까요?]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응.] 이라고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입밖으로 내려하면 기침이 나온다.
거기에 몸이 무거웠다. 그뒤론 죽이 맛있어서, 먹고있는 사이에 식욕이 생겼기에 죽에만 정신이 팔렸던 탓도있다.
나는 샐러드까지 깨끗하게 비워냈다.
[잘먹었습니다.] 라며 합장하자 그녀는 기뻐해주었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감자 입술에서 그녀의 손끝을 느꼈다. 보기좋게끔 예쁜 네일의 끝부분이, 내 입술 위를 춤추듯스친다.
그녀는 무슨노래인가를 노래하고있었다.
들리지 않을정도로 작은 소리로.
그리고 그렇게 노래하며 내게 이렇게 물었다.
[어디까지 알았나요?]
디스켓에대해서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말도 않았다.
실제로 이해된 거라곤 하나도없었기에. 그러니 대답할수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부탁이에요... 부탁이니깐... 당신에게 보이지않는 날 쫓지말아요.
거기서 멈춰주세요. 이제 곧 끝나니까... 이제 조금이면 다 끝나니깐...]
그녀는 그렇게말하고선 내 배에 머리를 뭍었다. 이제 곧 모든게 끝난다. 고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채로, 아무 답도 하지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역시 무겁구나... [봐! 내 말대로잖아! 이 멍청아!]라고 친구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밤은 얼마나 감긴걸까. 우리에겐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걸까. 아무런 대답도 않은채로, 나는 잠 속으로 도망쳤다. 그녀의 목소리. 그건 얇고 자장가에 딱맞는 부드러움이 있다.
[여기에 있어요.]
[당신의 곁에있어요.]
7
8일 아침.
어렸을적부터 쭉 다니고있는,
주치의가있는 병원에 갔다. 그녀는 대합실의 납작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 갈색에 합성피혁의 의자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있고, 그 구멍들은 껌테이프로 보강되어있다. 몇번이고 보아온 이 갈색의 의자에 앉아있으면... 정말이지 우울해진다. 아마 병원의 음울한 이미지가 박혀든거겠지.
주치의는 고령에 새하얀 콧수염을 자랑하시는, 애들에게 한없이 상냥하신 할아버지다. 병원에서 내려주는 처방이라곤 '안정' 이것뿐이며 이게 처방전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기위해서 이곳에 온다. 안정을 위해.
이 병원에서 2종류 이상의 약을 처방받았던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할아버지가 마음에 든다.
[먹어도 좋고, 먹지않아도 좋단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있는듯했다. 문진과 촉진이 끝나, 셔츠에 손을 넣고있자 할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저 아가씨랑 함께 있도록 하거라. 곁에서 간병받도록 하는게야.」 내가 그 말을듣곤 웃으면서,
[왜죠?] 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시원스레 이렇게 말했다.
[젊은 남자의 감기에 딱맞는 특효약은, 젊은 아가씨이지. 껄껄껄] 놀리듯이 내게 말하셨는데 그 대답이 어지간히도 이상한탓인지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8
대합실에 돌아가자 그녀의 등이 보였다.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서 핸드백을 정리하고있었다. 그러다 내 기척을 느끼곤 뒤돌아보는 그녀.
[어서와요, 다행이네요, 별탈 없어서.] 그렇게 말한 그녀의 손에는 한장의 플로피디스켓이 쥐어져있었다. 플라스틱의 투명케이스와 함께.
그녀는 디스켓을 보였음에도불구하고 별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내 눈앞에서 디스켓의 검은 부분을 보여왔다. 머리 근처를 빙글빙글 집게손가락으로 돌리는 행동. 그 손끝엔, 그녀의 얇은 머리가 감겨져있었다.
한올만이.
그녀는 디스켓의 자기디스크를 가드하는 금속셔터를 열고 지금 갓 뽑아낸 머리카락을 셔터의 슬릿에 통과시키고선, 빙글하고 디스크본체에 돌돌말아 라이터를 꺼낸뒤
디스크를 살짝 굽는다. 나는 웃었다. 이런거였나... 조심성이많은 공주님이다.
디스켓은 봉인되어있었다. 그 호텔의 어둠속에선 전혀는 아니지만 보이진 않았다. 아니,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눈치채질못했다. [딱히 당신을 의심하는건아니에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 디스켓은 곧바로 오는게아닌 수 명의 손을 건너오니 디스켓의 봉인은 무르다.와 신중히 다루지않으면 곧바로 봉인이 풀려버린다며. 부팅따윌 하려한다거나 누군가가 내용물을 열람하려할경우 곧바로알수있다고한다.
파일의 제작자는 동료조차 신용하지않는단건가.
그녀는 신중하게 디스켓을 투명케이스에 담았다.
그뒤[오늘은 댁에서 묵도록할게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때, 나는 끝내 참을수없게 되어선 그녀의 손을쥐고 주저앉았다. 어떻게해서든 묻고싶었다. 묻지않아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적기다, 그녀가 눈앞에있으니까. 눈앞에 있으면 안심감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없는 밤은 어떻지? 나는 침대 한가운데서 눈을 감지도 못하고서 밤을 보내게 된다. 분명히 그렇게된다. 그런건 절대적으로 사양한다.
10
「저기, 케이코. 그 디스크가 널 위험에 빠뜨리거나...그러진않아?」 그녀는 내가 갑작스레 움직였기에, 놀라서 의자 위에서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나와 그녀의 거리가 벌어진다.
그 탓에 서로 맞잡은 손이 현수교처럼 팽팽하게, 늘어졌다. 몇초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고개저었다.
그뒤, [절대,그런일은 없어요.]라고 작게 말했다.
「고마워. 그럼 한가지만 더 물을게」 조금 안심되었다. 그녀가 나를 걱정하고 순간적으로 거짓을 말한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한다면 이 이상 묻는다 할지라고 부질없다. 하지만 나는 안심하기로했다. 그렇게 믿기로했다. [이제 말하고싶지 않아요.] 그렇지않아, 그런게아냐라며 난 머리를 흔들었다. 「친구의, 그러니까 OO의 메일주소를 어떻게 알아낸거야?」 그녀는 [미안해요 멋대로 봐버려서...] 라고 말하곤 이렇게 덧붙였다.
호텔에서 머물던 밤. 이틀이나 엊그제, 좀더 전이려나?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진이 PC에 비춘채로 되어선, 새까맣게되었길래 그걸 닫자 브라우저에 메일수신함이 표시된채가 되었다고한다. 새벽.
나는 꾸벅꾸벅 졸고있었다고한다. 그녀는PC에 박힌채인 디스켓에는 손대지않았다고한다. 아마 내가 슬쩍 돌려준다고 생각했다고한다. 그 밤부터 그건 알고있었다고한다. 그걸듣고 자신의 별 같잖은 첩보활동이 한심해져왔다. [여러가질 물어서 미안해.] 라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커피라도 마시고가자. 회사에 연락도 넣지않으면 안되겠는걸.. 하고 말하자 그녀는 볼일이있다며 시부야에돌아갔다.
그녀는 대체 어디서 짐을 가져오는것일까?
어디서 옷을 갈아입는것일까?
나는 알지못한다.
하지만 확실히 알고있는건,
그녀가 예쁘게 치장하고서 돌아온다는것뿐이다.
매일 돌아가는 시부야의 거리엔 뭐가있는걸까? 그런 의문이 언제고 떠오르곤 사라진다. 별달리 중요하지않다는건 알고있다. 질문하는건 금지되어있다. 뭐어...이대로도 좋겠지. 여자가 말하는건 언제든지 옳다.
옳지않을땐 입을 열지않게되니까.
병원주변엔 아직까지도 밭들이 듬성듬성 남아있다. 누군가의 애마였다가 지금은 버려져 처량한 처지가 된 붉은 밴. 저녀석이 병원의 정면에있는 밭의 모퉁이에 자리잡고있다. 왜 저녀석이 이런곳에 폐기된채로 있는건지 이유는 모른다.
유리는 전부 제거한채라 지금은 잡초의 모판이되어있기에 혹시나 봄에는 별난 오브제처럼 보일지도모른다. 민들레와 제비꽃, 그 외 이름모를 작은꽃들. 공주님의 기억도 언젠가 이리될 때가 오려나?
공주님이 속옷 차림으로 잠이 들고 한참 뒤 메일이 왔다. 보낸 사람은 당연히 오타쿠 친구. PC로 메일을 보낼테니 확인해보란 내용이었다. PC를 켜서 파일이 첨부된 메일을 확인했다.
[지금까진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파일은 정답이었던 것 같아. 지금까지 별 의미없이 나열해놓기만 하던 퍼즐 조각들을 정확히 원래 자리에 끼어 맞출 수 있을지도 몰라. 헌데 우선 확인해두고 싶은 게 있어. 무슨 방법을 쓰든간에 그 여자 본명을 알 수 없을까? 하기 싫겠지만 우선 그 여자 소지품에서 면허증같은 걸 확인해봐. 이 자료 대로라면 그녀의 본명은 사토 케이코. 나이는 19살 국내 면허증을 취득한 상태야. 그렇게 젊은데도 아시아 몇개국과 유럽 몇개국을 여행한 경험이 있어. 광동어를 쓸 줄 알아.
해외 은행에 계좌를 뒀는데 거액의 예금을 맡긴 상태야. 좀 더 상세한 설명은 우선 그녀의 면허증을 확인하고 나서 할께. 물론 여기서 그만 둬도 돼. 이건 네가 선택할 문제야. 이 앞으로 나가는 건 그녀의 프라이버시에 접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느쪽이든 결정을 내린 다음 연락 줘. 기다리고 있을께.]
내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그녀가 가진 플로피 디스켓의 내용만 알면 그만이었는데. 나는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걸로 충분해. 고맙다. 나는 여기서 그만둘래.]
메일을 보내고 나서 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분명 그녀의 플로피 디스켓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걸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결정내린 채 끝내려고 했다. 그녀는 뭔가 좋지 않은 것에 연관된 듯 했기에... 그러니까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망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상 나아가는 건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들여다보는 행위다.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나는 결국 그녀의 핸드백을 뒤졌다. 지갑에서 몇장의 신용 카드와 면허증을 발견했다. 이름을 확인해보니 사토 케이코라고 적혀 있었다. 생년 월일로 19살이란 것도 확인했다. 나는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녀의 이름은 사토 케이코, 면허증을 확인했다. 파일을 송신해줘. 그리고 설명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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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내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엄청 빠른 속도로 답장이 돌아왔다.
[갑작스런 이야기라 믿기 힘들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 면허증은 가짜야, 즉, 위조 면호증. 그 여자는 면허를 취득하고 1년 뒤에 면허 정지를 먹었어. 면허는 다시 재발급 받질 않았어. 왜 그런지 조사하기 위해서 조금 위험한 짓을 했다. 그런 류의 뒷정보를 다루는 녀석하고 거래를 좀 했지. 돈이 들긴 했지만, 돈 내놓으란 소리는 안할테니까 안심해라. 하지만 에어조던은 반드시 받아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그 여자의 이름 빼고 남은 정보는 모두 가짜야. 19살이란 것도 거짓말. 아마 면허증에 적힌 정보들은 어떤 패스워드라고 생각해. 그래서 이름 이외의 정보는 누군가가 계속해서 바꾸고 있는 것 같아. 입 다물고 있어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결국 그녀의 지갑을 뒤질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네가 포기해주길 바랬어. 그만둔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는 안심했는데... 결국 너는 나아가는 걸 선택했지. 실망이다.]
면허증도 가짜였구나, 그건 정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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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메일
[우선 GIF 파일에 대한 것. 사진 속 남자애가 가진 물총에 주목해봐. 등록 상표가 찍혀 있어야 되는 곳에 이상한 숫자가 적혀 있지. 보면 알겠지만, 이전 사진 파일에 비해서 손질이 잘되있어. 언뜻 보면 눈치챌 수 없는 수준으로. 아마 프로가 손본 것 같아.]
사진속 남자애는 일본인이었다. 어째서 그걸 단언할 수 있냐면 남자애가 쓰고 있는 모자가 내가 초등학교 운동회때 썼던 모자랑 똑같았기 때문이다. 남자애가 쓴 모자는 사이즈가 너무 컸다. 모자 챙에 얼굴이 가려 입술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가 혹시 그녀의 동생이려나. 남자애는 5살 정도로 보였다. 매우 야위어 있었다. 커다란 물총을 꼭 껴안고 있었는데
남자애가 그걸 아주 소중히 여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중한 건 양손으로 꼭 껴안는 법이다. 사진 속 이 남자애처럼. 다른 누군가가 들고 가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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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메일.
[다음은 엑셀 파일. 그녀는 위조 여권을 쓰고 있어. 4년 전에 정부에서 발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1개월 전 신주쿠에서 위조된 거야. 그 위조 여권을 만드는 비용은 엄청 비싸. 그러니까 어지간해선 들통날 일도 없을 테지만. 남은 건 몇가지 위조와 서류 예금 리스트가 적혀 있는 것 정도. 위조 여권을 만든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아. 몇번이나 위조 여권을 만든 것 같거든, 다른 곳에서. 여기에 그 주소도 적혀 있어. 봐도 별로 뾰쪽한 수는 없을 테지만, 일단 딸려 보낸다.
그리고 메모장. 이건 저번처럼 추측이외에는 손쓸 수 있는 게 없었어.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걸 복사한 것. ...이건 전적으로 추리 드라마 수준의 추측이지만... 그 여자는 얼마 뒤 해외에 나갈 거야. 목적지는 인도의 델리. 만약 그녀가 1주일 이상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면, 나한테도 명탐정의 자질이 있단 소리가 될테지.
어쩌면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복잡한 일이 아닐지도 몰라. 미인이 얶혀 있으니까 뭔가 특별한 일이라고 억측을 내린건지도 모르지. 그 외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줘. 더 이상 골치아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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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주님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공주님이 말해준 마을이나 공원도 절대 가볼 수 없는 가공의 존재. 정말로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그런 곳. 나는 공주님에 대한 건 아무 것도 모르니까. 심지어 이름마져도 모른다. 친구는 확실하다고 결론내렸지만, 그건 확인의 과정일뿐. 아무도 공주님의 진짜 이름은 모른다. 공주님은 내 손이 미치는 곳에 누워 자고 있다. 부드러운 앞머리가 이마에서 흘러내린다. 작은 등 위로 긴 머리카락이 내려앉아 체형을 드러낸다. 나는 공주님에게 접할 수 있다.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하지만 그녀는 이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다.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먼 이국의 땅에서. 내가 손댈 수 없는 과거의 악몽과 함께. 공주님이 눈을 뜨면 어딘가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자. 공주님이 바란다면 아주 먼곳이라도 상관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정 되있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공주님의 웃는 얼굴을 기억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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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구가 보낸 메일에서 눈을 돌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다시 한번 더 메일을 보냈다. 보낼 파일은 없다.
[어이, 공주님은 그렇게 부자인데 왜 나같은 놈이랑 노는 걸까? 이런 행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여러가지 충격이 겹쳐 넋이 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친구도 그걸 감안했는지 딱히 쓴 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낸 정보가 진실일 가능성은 지금 현재 없는 거와 같아. 지금 상태에서 그 여자의 정체는 그림자 같은 거지. 애초에 내가 보기엔 미녀들은 모조리 요정이랑 같아. 거기에 있지만, 손에 닿질 않으니까. 그건 나한테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거랑 같지. 네 입장에서 보면 사정이 조금 다를테지만 말야.]
미안하지만, 나도 너랑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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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 눈을 떴다. 공주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고양이가 볕을 쬐며 졸듯이 창문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햇빛에 감싸여 계속해서 잤다. 먼저 눈을 뜬 건 나였다.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샤워를 했다. 머리속이 깨끗하게 정리됐다. 나는 목욕 타올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공주님을 깨웠다. 머리속이 정리되니 스스로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평범한 남자들이 그러하듯 나는 그녀를 요구했다. 그녀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그녀는 나를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이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공주님이 욕실에 들어간 사이. 나는 그녀를 위해 할 일을 생각했다. 나 밖에 할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물론 되도록 호들갑스런 게 아닌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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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은 약속이 있다며 잠시 시부야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천천히 식사를 한 뒤 호텔에서 나왔다.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도쿄역. 나는 그녀가 욕실에서 나온 뒤 이런 제안을 했다. 과거 그녀가 자주 시간을 보냈던 공원, 그곳에 가보자고. 동생과 그녀의 소중한 추억들로 가득한 그 공원에. 그녀는 처음 그 곳에 가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내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고맙다고 말했다.
[사실 몇번이나 혼자 가보려고 했어요. 하지만...왠지 무서워서...]
그녀는 나랑 꼭 함께 가보고 싶다 말했다. 도쿄역에 나오긴 했지만, 약속 장소로 잡기에 이곳은 너무 넓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생각한다. 객관적인 규모만이라면 신주쿠 역이 좀 더 크겠지만, 도쿄역은 이상하게 넓고 커보인다. 머나먼 어딘가와 어딘가를 묶는 거점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머리속에 떠오른 감상적인 생각을 애써 내쫗고 공주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한 노력해보고 싶다. 이런 어설픈 생각은 좋은 결과를 내지 못 한다는 건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좀 더 서둘러야 한다. 남은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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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도 신칸센 플랫폼에서 만나기로 한 게 정답이었다. 공주님이 플랫폼으로 달려오는 걸 바로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우선 커피를 마신 뒤 요코스카행 기차를 타러 가기로 했다. 그 동안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 않았다. 공주님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가는 곳은 추억이 죽은 땅. 과거의 기억속에 얼어붙어 다시는 녹아내리지 않는 장소. 그녀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그곳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 가고 싶어 했다. 자신이 잃어 버린 무언가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기대를 안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녀는 동생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나도 동행하는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 기차의 창가 자리를 확보했다. 나는 그녀의 정면에 앉았는데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손을 잡아줘요.]
아무 고민없이 바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객차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나는 CD 워크맨에 이어폰을 꽂아 왼쪽 부분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딱히 듣지 않아도 돼,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거야.]
전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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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를 지날 쯤 바깥이 어두워졌다. 회사 간판이나 주유소의 오렌지색 불빛이 유리창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과 겹쳐 시야 너머로 사라져 간다. 드문 드문 흘러가는 민가의 불빛은 어째서인지 외롭게 느껴진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감상을 느끼고 있는 걸까.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약하게 떨리거나 굳어지기도 했다. 그녀에게 춥지 않냐고 물어보니,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녀는 핸드백에서 핑크색 곰인형을 꺼내 유리창에 기대놓았다. 곰한테도 바깥이 보이도록 머리에 씌워둔 병뚜경 모자를 조절해서. 그 곰인형은 다리가 짧고 몸통은 이상하게 길었다. 밸런스가 안잡힌 몸통은 귀여웠지만 동시에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이 애는 예전에 이 풍경을 본 적 있어요.
그땐 도쿄로 가는 쪽이었지만요. 이 애의 주인도 이미 없고...]
나는 내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그녀의 귀에 마져 끼웠다. 그리고 워크맨의 볼륨을 높였다. 제 아무리 슬프고 괴로운 추억이라도 음악은 그걸 흘려 보내게 해준다. 효력이 바로 나오지 않을지도라도 음악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너무 시끄러우려나?]
아마 볼륨이 너무 높아 내 목소리를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알아차리곤 괜찮다 말했다. 음악소리가 사라지니 규칙적인 진동 소리가 내 귀를 메웠다. 다른 손님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요코스카로 가는 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나한테 있어서 엄청 길게 느껴졌다. 그건 그녀의 아픔이 나에게 전염된 탓일까.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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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스카 역에 도착한 뒤 나는 자판기에서 생수와 페트병 콜라를 샀다.
콜라 페트병뚜껑을 따서 생수로 씻었다.
그리고 콜라와 생수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가 그걸 산 이유는 단 하나.
곰인형의 새로운 모자를 마련하기 위해서.
공주님의 입가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 택시를 잡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공원은 5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했기에
바로 그곳에 들르기로 했다.
택시 운전 기사는 가벼운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역 근처 맛있는 라면집이나 싸게 마실 수 있는 선술집을 가르쳐줬다.
지금 내가 알고 싶었던 정보였다.
불필요한 생각은 하지 말자.
나는 그녀에게 돌아 오는 길에 거기에 들러보자고 말하거나,
택시 기사의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농담에 큰소리로 웃었다.
얼마 뒤 공원에 도착했다. 내가 상상하던 공원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애초에 그곳은 공원이 아니라 신사 였다. 신사 주위 공터에 미끄럼틀과 그네, 자그마한 나무 몇그루가 서있었다. 토리이는 다 썩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미끄럼틀이나 그네도 전부 삭아있었다.
[여기야?]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주위가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발밑에 나뒹구는 쓰레기들을 보고 여긴 공원이 아니라 그저 방치된 공터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가로등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맑아서 인지 별과 달이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입에서 새어나온 새하얀 한숨이 달빛에 닿아 흘렀다. 오랜 시간 신주쿠의 어둠을 방황해 와서 일까, 그녀는 이 곳의 짙은 어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짙은 어둠 속에 녹아드는 듯 조용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건 그녀가 이곳에 올 건 후회하지 않는 것 같아서일까. 아나면 그녀가 녹아든 어둠에 감싸여 있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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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로 덮힌 수도 꼭지. 바람이 흩어버려 흔적도 남지 않은 모래사장. 목이 날아간 석상. 둥치부터 껍질이 벗겨져 나간 나무. 그녀는 그것들 전부에 추억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깡통차기를 할 때 거점으로 삼았던 나무. 아이들의 손때를 탔기에 나무 껍질은 늘 흉하게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살아 있어요. 그리고 내년에 다시 싹을 띄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죠.]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말했다. 그 때 그 여름. 그녀의 동생도 술래잡기나 깡통차기를 하며 이 공터를 분주하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일테지.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좁은 공터 안을 방황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린 탓인가, 아이들이 놀만한 기능을 상실한 공터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쓸만한 거라면 담력 시험 정도일까. 신사 역시 복구하는 것 보단 허물고 다시 짓는 게 빠를 정도로 낡았다. 그 낡은 신사 건물을 배경으로 그녀가 서있다. 그녀는 태양이 그려진 건물 천장 나무판을 보고 있었다. 주홍색으로 칠해진 나무판. 나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물방울을 보았다. 분명 뭔가를 생각해낸 걸까. 그 나무판에 어떤 추억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 더미에서 길쭉한 막대기를 하나 찾아내서 그 나무판을 힘껏 찔렀다. 엄청나게 많은 먼지와 함께 나무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옛날에 발매됐던 캔커피 깡통도 함께 떨어졌다. 그녀는 깡통을 빙 돌려보며 확인하더니 이내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간신히...돌아왔어...]
그녀는 내 손을 잡은 채 파르르 떨었다. 하얀 숨결이 조용히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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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캔커피는 공주님이 용돈을 전부 써서 마련한 동생의 생일선물이었다. 헌데 공주님도 조금 마시고 싶어져서 중간에 같이 나눠 마셨다고 했다. 동생은 깡통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천장 구멍에 던져넣었다고 했다. 당시 동생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깡통을 천장에 넣으려 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이제 충분해요.]
그녀가 충분하다면 나도 충분하다. 돌아가자, 토쿄로. 우리는 요코스카 역을 향해 터벅 터벅 걸었다. 도심임에도 겨울 바람은 매우 추웠다. 내 손에 느슨하게 걸린 그녀의 손가락에서만 온도가 느껴졌다. 이 곳을 방문하고 나니, 우리가 함께 보낸 호텔방이 멀게 느껴진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반걸음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그녀. 왼손에는 곰인형을 들고 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갑작스런 겨울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린다. 깡통은 들고 왔으려나. 추워서 콧물이 나온다. 호텔에 돌아가면 최대한 따뜻하게 해서 자자. 그 전에 뭔가 먹어야 될 텐데. 머리를 굴려봐도 별다른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오늘 밤이니까 더욱 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내 머리속은 하릴 없이 표류할 뿐이다. 무슨 짓이든 해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봐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난 또 그녀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너무 강렬한 욕구에 그녀를 망가뜨리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갈팡지팡. 계속, 계속 갈피를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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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스카 역은 이용자가 많은데 비해 비교적 작다. 그래서 해가 지면 근처 상가 건물에 섞여서 역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역 근처 해안가 산책 코스에서 서서
불빛이 반사되어 일렁거리는 바다를 보았다. 추위는 몸속 깊숙히 파고 들어 코트 속에도 온도가 느껴지질 않았다. 그녀의 손이나 얼굴은 바닷바람에 희롱당해 어느샌가 핏기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비비면서 온도를 나눠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니 순식간에 손끝의 감각이 사라진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도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지 않았다.
[불빛이 예쁘네요.]
그녀는 속삭이 듯 말했다.
[저 빛에 뛰어들면 죽을 수 있을까요.]
[몇분 안에 정신을 잃겠지. 날씨가 날씨니 만큼.]
그녀가 갑자기 뛰어들거나 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감상에 빠져 불현듯 입을 열었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더구나 그녀에겐 벌써 몇년에 걸쳐 찬스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데로 따라갔다. 한참동안 서 있던 그녀는,
[있잖아요.]
[응?]
[만약 내가 지금 같이 죽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나는 웃었다.
[안 죽어. 절대로.
나는 공주님을 도쿄로 데리고 갈 거야. 공주님이랑 호텔에서 따뜻한 커피를 함께 마시고 싶으니까.]
그녀는 그제서야 발을 옮겼다. 곰인형의 작은 팔을 들어 바다쪽을 향해 바이 바이하며 흔들었다. 그 때 나는 택시 기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 아저씨 말대로라면 이 근처에 맛있는 라면집이 있을 것이다. 맛있는지 어떤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뜨거운 국물을 마실 수 있다면. 우리는 택시 기사가 일러준 라면집으로 향했다. 라면은 의외로 상당히 맛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국물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 밤.]
그리고 그녀는 조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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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도착했을 쯤 자정이 지나 있었다. 막차까진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우리는 바로 환승 플랫폼으로 갔다. 너무 추워서 웃길 정도로 몸이 마구 떨렸다. 덜덜 떨리던 몸이 잠시 진정됐다 싶으면 또 떨렸다. 추워서 마비되있던 피부에 감각이 돌아오자 이번에는 너무 예민해져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호텔에 돌아왔을 때엔 어느새 새벽 1시가 넘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프런트에 룸서비스로 커피를 주문하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게 1시 30분. 방안에 들어선 나는 온몸에서 뜨거운 열을 발산하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알 정도로 상기된 내얼굴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이마에 손을 대고 뭐라 말을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뒤 돌아온 그녀의 손에 감기약과 해열제가 들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호텔 상비약인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약을 먹는 척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단 감기가 들면 그걸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다. 그러니까 약을 먹어도 의미는 없다. 거기다 나는 약을 정말 싫어한다. 그녀는 나를 말려들 게 한 걸 후회하는 듯 했다. 이렇게 추운 밤에 요코스카의 어둠속으로 나를 몰아넣은 게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가자고 한 건 나야. 네가 아니라 내가 가자고 한 거야. 내가 너를 울린 거라구. 어쩌면 그녀와 재회한 그날 나는 이미 감기에 걸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사나 전철에서 옮긴 건지도 모른다. 감기가 잠복해 있다 오늘 우연히 발병한 것이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신사가 있던 공터가 너무 추웠기 때문에 내가 감기에 걸렸다고. 오로지 자신의 탓이라고.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허나 내의지와는 관계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계속해서 눈을 뜨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난 잠결에 내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공주님의 향기. 여자 특유의 부드러운 체온. 공주님이 내손을 잡고 있어.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아. 이렇게 평온한 어둠에 싸여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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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꾸었다. 요코스카 역 근처 산책 코스. 가로등 불빛도 없는 도로를 엄청난 속도로 달려간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간 코스를 따라 마치내 그 공터에 들어섰다. 그곳에 있는 건 여름날의 풍경.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저녁 풍경. 아이들의 웃는 소리와 소란스런 발소리. 그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자애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니 내가 아닌 내 뒤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TV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주 맑고 선명했다. 나는 매미가 있는 곳을 찾았다. 눈을 돌리니 어느새 여자애가 코앞에 서있다. 여자애는 손에 중국제 토카레프를 들고 있다. 목에는 핑크색 곰인형과 붉은색 여권을 줄에 꿰어 걸고 있다. 여자애는 내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여자애는 맨발이었다. 그리고 흙투성이였다. 여자애의 손끝이 토카레프 방아쇠에 닿았다. 달칵 마른 쇠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당겨진다. 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총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했다. 공주님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한테 뭔가 말을 걸었다. 나는 그걸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지금은 몇시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공주님이 입으로 물을 머금은 뒤 나한테 먹여 줬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너무 괴로웠다. 감기 때문에, 방금 전에 꾼 꿈 때문에. 아득히 먼 곳에서 무반주 첼로 소나타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이 나를 위해서 음악을 틀어준 걸까. 음악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체온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