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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이건 내 체험담이다.
그때 사건의 흐름을 소설처럼 쓰고 있긴 하지만.
소설처럼 쓴 건 당시 내 감정을 전하는데 이쪽이 좀 더 편하기 떄문이다.
몇가지 일은 이미 잊어버린데다, 조금 각색한 부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그녀의 말투 같은 것.
실제로는 좀 더 간결하면서도 귀여운 말투였다.
내 글솜씨가 별로라서 겨우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메일도 여기에 쓴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주고 받았다.
그녀와도, 오타쿠 친구와도.
228
[배 안 고파?]
[배고파요. 뭐라도 안 먹으면 죽어버릴지도.]
호텔에서 조금 걸어간 곳에 이탈리아 식당이 있단 말을 했다.
마치 단골인 것처럼 상세한 설명도 겯들였다.
물론 나 역시 몇번 간 적 없는 곳 이었지만.
가게로 가는 도중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애써 식사를 준비해뒀는데 나는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집에 오질 않아서 화가 나신 듯 했다.
나는 일 때문에 3일 정도 들어갈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수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양심이 쑤셨기 떄문에 전화를 끊은 후 바로 동생한테
[어머니가 아프신 것 같아. 난 지금 갈 수 없으니까 빨리 집에 가봐.]
이렇게 메일을 남겨뒀다.
동생은 전날부터 여자친구네 집에 틀어 박혀 있었다.
헌데 나는 돈으로 데이트 상대를 사서 연휴를 보내고 있다.
노동과 임금은 평균화되야 한다 생각지 않아? 친애하는 동생.
그녀는 복수아닌 복수를 마친 나를 보며 웃었다.
[좋겠네요. 어머니가 상냥한 분이시라.]
229
나와 그녀가 같이 보낸 시간은 고작 며칠.
당연히 나는 그녀의 가정 사정이나 주변 환경같은 건 모른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벌써 몇번이나 그녀가 언급한 말을 생각해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내린 억측을 당사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기에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중,
[그린과 화이트, 그때 그 질문은 대체 무슨 의미였어?]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해버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응, 화이트랑 라이트 그린]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오늘 밤을 기대하라고 말했다.
아, 그런 거 였군.
내 팔짱을 끼거나 앞서 걸어가거나 하면서
이래저래 부산한 그녀를 쳐다 보았다.
데님 스커트에 작은 종이 태그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돌려 태그를 떼어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빙긋 웃었다.
작은 종이조각에는 미스 식스티라는 영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16살이라...
그녀는 꽤 어려보이긴 했지만 실제론 20살이 넘겠지.
아니 어쩌면 정말 10대일지도.
결국 이후에도 나는 끝내 그녀의 진짜 나이를 알 수 없었다.
231
가게 안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예약을 해뒀기에 망정이지 큰일날 뻔 했다.
코트를 벗어 점원에게 건네준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은근히 이런 경험이 많은 거 같네요?]
이 말에 조금 웃었다.
그녀의 말투에는 외형과는 달리 의외로 라는 의미가 숨어있었다.
인기 없어 보이는데 어째서 이런 곳에 대해 잘아느냐는 소리겠지.
[일 때문에 자주 왔거든.]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머리속에서 재구축되어
그녀가 남자를 평가하는 시선을 개선하는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바보같은 상상을 하며 살짝 웃었다.
나는 공주님이 추측한 그대로의 한심한 남자인걸.
식탁에는 곱게 자수가 놓인 비싸보이는 식탁보가 깔려있었다.
점원이 내가 선택한 빵을 식탁보 위에 늘어놓았다.
그녀는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같은 눈빛으로
점원이 움직이는 걸 쳐다 보았다.
[먹어도 괜찮아요?]
[물론, 커피 마실래?]
[으음~ 술 마시고 싶은데.]
[좋아하는 와인 같은 거 있어?]
[난 그런 거 잘 몰라요.]
나도 그런 건 잘 몰랐기 때문에 점원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그녀는 빵을 잘게 찢으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어깨,
가녀린 쇄골에서 목덜미.
그리고 입술이 위 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공주님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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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디쉬가 옮겨지고 우리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적당히 배가 고프기도 했고, 이렇게 맛있는 식당은 흔히 없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나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그녀는 디저트에 손도 대지 않고 와인 1병을 전부 비웠다.
테이블 위에 내던지듯 올려놓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꼭 감고 있던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아니 정말 예쁘구나...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녀의 입술이 좌우로 조금 늘어나며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이윽고 그녀는 갑자기 식탁에 고개를 푹 하고 박았다.
그리고 이어진 나와 함꼐 있으니 정말 마음이 놓인다는 그녀의 한마디.
위험해, 정말로 위험하다.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이 여자를.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케이크를 쳐다보다 내앞으로 쑥 밀어냈다.
[왜 그래?]
[케이크 싫어요.]
[단 건 싫어해?]
[단 건 좋지만 케이크는 싫~어~]
결국 그녀 몫의 케이크는 내가 먹어치워야 했다.
케이크를 먹기 위해 2잔째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을 때 문득 깨달았다.
그녀에게서 풍겨지던 아련한 향기.
그건 바닐라 엣센스 였다.
혹시 그녀의 집에선 빵 가게라도 하는 걸까.
아니 그렇다 해도 바닐라 엣센스는 그렇게 강한 냄새였나.
빵냄새 대신 바닐라 엣센스 냄새만 묻을 수 있는가.
그녀는 빵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마찰을 겪고 있는 건가.
그래서 케이크를 싫어하는 건가.
[이 케이크는 맛있어 보이니까 조금만 먹어볼까.]
그녀의 한마디에 내 어설픈 추리는 단번에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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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서 나오자 그녀는 아직 좀 더 마시고 싶다면서
이번에는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밤바람을 맞으며 걷던 중, 그녀가 문득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상냥한 어머니가 계셔서 좋으시겠어요.]
[전 아버지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어요.]
그녀가 안내한 가게는 마치 공사가 덜 끝난 듯한 외관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모던한 느낌이 드는 근사한 가게였다.
가게 안에는 잡지에서 볼법한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도저히 내가 엉덩이를 붙일만한 장소로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 가장 안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으니
곧바로 점원인 듯한 여자가 다가왔다.
플라스틱 마냥 빛이 감도는 구릿빛 피부.
얼굴이 작은데다 머리카락도 위로 소구치듯 묶었기에
마치 흑인 모델처럼 보였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줄무늬가 들어간 복장이
균형 잡힌 몸매에 휘감겨 상당히 보기 좋았다.
나는 진저엘과 칼루아 밀크를 주문했다.
너무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엄청 부끄러웠다.
[이 가게는 말이죠. 이상한 사람도 별로 없고. 아침까지 열려 있고.
점원이 신경을 많이 써줘서 흠뻑 취해도 안심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새근거리며 잠들었다.
와인 2병중 거의 8할 가까이를 마셨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테이블에서 계산을 마치고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가게안의 손님들이 환성을 올렸다.
하지만 나는 축 늘어진 그녀때문에 은근히 불안했다.
나한테 어울리지 않은 장소에 혼자만 남겨진듯한 느낌에 초조해졌다.
따로 과시할 속셈으로 그녀를 안아 든 건 아니었다.
이상할 정도로 초조했기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가게 점원이 눈치빠르게도 그녀가 벗어뒀던 코트를 들고와줬다.
[조심하세요.]
점원은 기계같이 무감정한 어투로 말했지만.
나는 되려 그 한마디에 초조함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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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나와도 그녀를 일어날 듯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택시를 발견할 때까지 그녀를 안고 있기로 했다.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 가벼웠던 데다, 따뜻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가까이 할 수도 있었으니까
등뒤로 조금전까지 있었던 가게의 음악소리와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가게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소리는 그 틈으로 흘러나온 듯 했다.
그러다 잠시 뒤 가게 문이 열리며 아까 그 점원이 밖으로 나왔다.
[이거 나중에 리카한테 말해주세요.]
그러면서 플로피 디스켓을 한장 꺼내 그녀의 핸드백에 밀어넣었다.
[택시 불러 드릴까요?]
하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한 뒤 그대로 큰길로 나왔다.
택시는 금새 발견할 수 있었다. 택시에 그녀를 실으며 나는,
[리카, 택시가 왔어. 이제 바로 돌아갈 거야.]
일부러 그녀의 이름을 섞어 말을 걸었다.
그녀는 순간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잠들었다.
리카...라는 이름이었구나.
한자로는 어떻게 쓸까, 아니 애초에 그것도 가명일지도 모른다.
도로가 꽉 밀렸기 때문에 호텔에는 한참뒤에나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도 잠이 든 바람에 택시 기사가 호텔 근처에서 일으켜줬다.
그녀와 함께 방에 돌아온 뒤 2시간 정도 잤다.
깨어나니 그녀가 나한테 딱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갈아 입을 옷도 안 가져왔다.
간단하게 샤워를 한 다음 샤워 가운을 꺼내서 걸쳤다.
거울에 비춰보니 웃길 정도로 안 어울렸다.
옷 가져올 겸 잠시 집에 갔다올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고 있는 그녀의 옷을 벗겼다.
속옷만 남긴 채 이불을 덮어줬다.
그녀의 속옷은 진주 조개 껍질 같은 무늬가 아로 새겨져있었다.
그 속옷에 둘러 쌓인 그녀의 모습은 무서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취해서 자고 있으니 별 수 없었다.
담배를 한대 피고 나서 그녀의 핸드백을 뒤졌다.
타인의 소지품을 뒤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죄악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플로피 디스켓에는 새카만 GIF 파일이 3개 들어 있었다.
뷰어로 확인해보니 온통 새카만 화면뿐.
다시 오타쿠 친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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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을 메일에 첨부해서 오타쿠 친구에게 보냈다.
특별한 언급 없이 그냥 부탁한다고만 적었다.
대체 이건 뭘까.
어떻게 봐도 새까만 화면만 보인다.
미묘한 차이를 확인할 수 없는 건 모니터 때문인가.
자고 있다 해도 그녀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나는 너무 부주의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짓을 하고 있단 감각이 나를 대담하게 만든 것 일까.
자고 있던 그녀가 부스스하고 일어났다.
아무 예고도 없이, 마치 태엽으로 움직이는 기계장치가
갑자기 움직이는 것처럼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나는 소리를 내기는 커녕 움직일 수도 없었다.
물론 PC에는 플로피 디스켓이 박혀 있는 상태.
모니터에는 수수께끼의 GIF 파일 화면이 표시되있었다. 새까맸지만.
나한테는 침을 삼킬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판단이 되지 않는 명한 표정인 채
근처를 둘러보다 나를 발견하곤 말했다.
[안돼, 안돼. 빨리 꺼야지.]
[꺼? 무엇을?]
그녀는 정말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내 머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한 뒤 방안을 기듯이 나아가
방안의 콘센트를 전부 뽑았다.
245
[리카? 리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봐도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혹시 이건 몽유병 이란 걸까?
내 부족한 지식속에서 그나마 이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냈다.
[리카, 왜 콘센트를 뽑은 거야? 혹시 이건 보면 안되는 거야?]
그녀는 마치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병사가 포복 전진을 하듯 기어다녔다.
[번개가 칠 때는 콘센트를 뽑아야해. 알았지?]
PC의 콘센트만은 어떻게든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꼬대하는 사람의 말에 대답을 하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말을 생각해내고 이후로는 말을 걸지 않았다.
냉장고 콘센트를 뽑고 침대 스탠드 콘센트를 뽑고 나니
방안엔 PC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빛만 남았다.
[자아~ 괜찮아. 이제 울지 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어르듯이 감싸안았다.
그렇다. 어르듯이.
적어도 연상의 남자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마치 나를 작은 아이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좀 전에 옷을 벗긴 탓에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이 닿았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침대로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다, 얼마 뒤 눈을 떴다.
간신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나란 걸 깨달은 그녀는
내 품에 아이처럼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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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무서운 꿈...이려나. 혹시 나 방안을 걸어다니거나 했나요?]
나는 정직하게 그녀가 방안의 콘센트를 전부 뽑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치거나 술에 취한 밤에는 자주 그렇게 걸어다닌다고 말했다.
그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운 건지, 후회스러운 건지.
그 때의 그녀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다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하진 않지만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 같던데.
아마도 아이, 그것도 남자 아이. 혹시 너의?]
순간 나를 붙잡고 있던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 갔다.
[...아뇨. 남동생이에요.]
[꽤 어린 애 같은데, 맞나?]
[앞으로도 계속 어린 애에요. 죽었으니까.]
[병...이었어? 대답하기 싫다면 말 안해도 돼.]
그녀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나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 몸을 떼는 건 안좋을 듯 해서 내쪽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 손님한테 너무 응석만 부리네요...]
[괜찮아. 충분히 감안할 만하니까.
평범한 손님이라면 벌써 예전에 화냈을 거라 생각지 않아?]
그녀는 조금 웃으면서 내 말에 수긍했다.
[살해 당했어요.]
[살해당해? 누군한테?]
그녀는 흘러 넘치려는 오열을 참을 수 없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눈이 새빨갛게 물들고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지 그녀는 얼굴을 내품에 묻었다.
[독감이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병원에 데려가주지 않았어요.
대신 집에서 푹 자고 나면 낫는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이상했어요.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열이 내리질 않은 거에요.
난 그 때 240엔 밖에 없어서...
그래서 동생을 어떻게든 병원에 데려가야 겠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어느 병원에 가야 되는지도 모르고...
택시를 타려고 해도 택시 기사들은 우리를 상대도 안해줬어요.
아주 추운 날 이었죠. 추운데 동생 몸은 너무 뜨거워서
뭔가 차가운 걸 마시게 해주려고 포카리 스웨트를 사왔는데.
조금도 마시질 못했어요. 소리를 질러도 눈을 뜨지 않고...]
그녀는 어물 어물 말을 잇다가 이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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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녀를 껴안은 채 프런트에 룸서비스로 커피와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손님 이름은 동생이랑 똑같아요...
결국 동생은 제가 죽인 거에요.
그대로 방에서 자게 놔뒀으면 열이 내렸을지도 모르는데...
나도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울음을 그쳤을 무렵, 아침이 밝아왔다.
우리 둘은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벌써 몇년이나 울어왔을 텐데, 자신의 죄를 잊을 수 없었던 걸까.
애초에 그녀의 [죄]는 [죄]가 아니었기에 더욱 안쓰러웠다.
그녀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애가 그대로 자랐다면 손님처럼 상냥한 남자가 됐을까요?]
나는 웃었다.
나는 상냥하지 않아, 나는 너를 돈으로 사려고 했어.
세상에 널리고 널린 속물들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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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울었다.
나한테 기대서 꾸벅 꾸벅 졸고 있던 그녀가 퍼뜩 일어났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휴대폰이 울린 걸 알았다.
[이런 망할, 뭐가 엄마가 쓰러졌단 거야!!
이 빚은 언젠가 꼭 갚아주겠어!!]
내 동생한테서 온 메일이었다.
무사히 집에 돌아간 것 같았다.
그보다 이제 10대도 아닌데 메일이라도 말투가 너무 가볍잖아, 너.
동생 녀석의 날건달같은 메일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일 이에요?]
[아니 동생이 보낸 거야.]
그 말을 한 뒤 아차! 하고 후회했다.
왜 이렇게 타이밍이 안 좋은 걸까.
좀 전까지 그녀가 동생을 생각하며 우는 걸 뻔히 봤으면서.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었다.
그런 나를 되려 그녀가 신경써줬다.
[땀이 나서 좀 기분 나쁘네요. 샤워하고 올께요.]
그녀는 침대 옆 클로젯에 손을 뻗어 샤워 가운을 꺼내 입었다.
작은 동물처럼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난 그녀는 새하얗고 긴 다리를 몇번 움직여
욕실로 몸을 감췄다.
거의 알몸으로 잤으니 추울지언정 땀이 났을리 없는데.
나는 욕실의 물소리를 들으며 흩어진 방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뽑아낸 콘센트를 원래대로 끼워넣고 그녀가 사모은 쇼핑봉투와
거기에서 나온 포장지를 정리했다.
그리고 침대 정리까지 마쳤다.
마지막으로 PC에서 플로피 디스켓을 꺼내 그녀의 핸드백에 넣었다.
[아참, 어제 말이야.]
나는 큰 소리로 욕실에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안내해준 가게. 거기 점원이 플로피 디스켓을 하나 줬어.
네 핸드백에 넣어뒀으니 확인해 봐.]
곧이어 욕실때문에 울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회답했다.
[응, 알았어요. 고마워요.]
특별히 동요하지도, 초조한 기색도 없는 보통 목소리.
그녀는 플로피 디스켓의 내용물이 뭔지 모르는 걸까.
이것 저것 생각하면서 그녀의 옷을 욕실 앞에 뒀다.
깨끗하게 정리된 옷들, 물론 내가 정리한 것이다.
보통 남자들은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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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랍인 터번처럼 머리를 둘둘 만 채 욕실에서 고개만 내밀었다.
그리곤 욕실 앞에 놓여진 옷과 속옷들을 보곤 깔깔거리며 웃었다.
욕실에 있어서 인지 그녀의 웃음소리는 꽤 크게 울렸다.
[역시 이상해요. 꼼꼼한 성격이란 건 곧바로 알았지만.]
역시 이상했구나.
그녀의 머리속에서 나는 이번엔 여자 속옷을 접어서 정리하는 남자
이렇게 분석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스스로는 나름의 친절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조금 이상한 짓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평소 클라이언트를 신경쓰듯 친절을 보인 김에
그만 이상한 남자로 낙인 찍히게 생겼다.
[저기 내 말 듣고 있어요?]
[아니, 그게 말야. 딱히 네 속옷을 만지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건 알고 있어요. 그거 알아요?
남자들이 저한테 상냥한 척 하면서 사실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거.
내가 베드에 던져둔 코트를 뭉개고 앉거나 구두를 밟는 사람도 있어요.
속옷을 훔쳐가는 사람도 있지요.]
욕실에서 플라스틱 캡 같은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그런 존재에요. 호텔에 비치된 편리한 기능 중 하나.
다른 것보다 조금 비쌀 지는 모르지만요.]
그녀가 욕실에서 나와 나한테 점프했다.
베드가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나 조금 기뻤어요. 신경 써준 게.]
262
분위기는 좋았지만 결국 그 이상은 없었다.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으려 하니 그녀가 도망쳤다.
어림도 없다는 듯 집게 손가락을 하나 들고 흔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칫, 칫 소리를 내다가 웃었다.
그녀의 아이 같은 행동에 나도 웃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호텔 종업원이었다.
그는 샌드위치와 커피 포트, 잔이 들린 은색 쟁반을 들고 있었다.
종업원은 호텔 마크가 찍힌 메모지를 나한테 건네주었다.
이 호텔에서 일하는 친구한테서 온 메모였다.
거기에는 [좋은 아침.]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오늘 할 것을 이야기했다.
내가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시부야에 용무가 있는데
금방 끝나는 거니까 그걸 끝내고 우리 집에 같이 가고 싶다 말했다.
내 방과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내 방 창문으로 바깥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
왠지 모르게 그녀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일까.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변덕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흥미를 보여준 점이 기뻤다.
나는 바로 승낙했다.
딱히 그녀가 봐서 곤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중산층 가정만이 있을 뿐.
그래서 그녀가 1시간 먼저 출발한 뒤, 가까운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쩌면 설날 요리가 남아 있을 지도 모른다.
멍청한 동생 녀석이 전부 먹어치우지만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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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출발하고 한참 뒤, 오타쿠 친구한테서 메일이 왔다.
잊어 버리고 있었다. 전날 밤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넌 아직도 탐정 놀이 중이냐.
널 그렇게나 매료시킨 여자는 엄청난 미인같은데 말야.
쳐다 보는 것 만으로 부왘~ 아니 실례.
그 여자 사진 찍어서 보내줘.
사진 안 보내주면 더 이상의 정보는 안 보내준다.]
머리가 아프다. 동생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뭔가 귀찮은 덤이 따라 붙는다.
이 친구는 무자비하다. 이 친구에 관련해선 착실한 답변을 안 할 경우
더 이상 회답을 얻는 건 불가능하다.
별 수 없기 때문에 공주님을 처음 만난 날 찍은 사진을 보냈다.
휴대폰으로 찍은 거라 그렇게 잘 찍은 건 아니다.
부자연스럽게 그림자로 덮여서 그녀가 미인처럼 보이지 않는 사진으로.
오타쿠 친구의 흥미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그 사진을 첨부해 보냈다.
보낸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답장이 도착했기에 놀랐다.
[어이, 내가 연예인을 잘 모른단 걸 노려서
적당히 굴러다니는 연예인 사진을 보냈나 본데.
'진짜' 그 여자 사진을 보내라구.
계속해서 날 우롱할 생각이면 차후 정보는 없다고 생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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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안된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거짓말이 아냐. 진짜라구. 그 GIF 파일은 대체 뭐였어?]
그러자 오타쿠 친구의 답장.
[뭐 있은 거 없어? 내 조건은 아직 충족되지 않았다구.
진짜라면 다른 앵글로 2장 더 보내줘.
정보는 그 다음이야.]
안된다. 고집을 부리고 있다. 이 친구의 나쁜점이 이것이다.
사진을 보내지 않는 한 더이상 답장도 안보낼 것이다.
나는 캔커피를 든 채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과
나와 그녀가 같이 찍은 사진을 첨부해서 메일을 보냈다.
오타쿠 친구에게서 금방 답장이 날아왔다.
[우와, 이거 진짜?
엄청 이쁘잖아!! 나도 반했다!!
이거 엄청 불공평하잖아!!
넌 영문 모를 파일들만 보내고 나를 그걸 필사적으로 해독.
그래봤자 이득 보는 건 너뿐이잖아? 나는 손해야.]
일단 상대하는 걸 그만 뒀다.
포트에 남아 있던 커피를 따라서 마셨다. 맛있었다.
커텐을 열어 방에서 보이는 도심 풍경을 내려다 봤다.
새가 날고 있고, 변명 수준으로 초록색으로 덮인 게 썩 나쁘진 않았다.
신호등을 깜빡이면서 커브하는 자동차,
비가 내리면서 발걸음이 빨라진 샐러리맨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공주님과 함께한 며칠동안이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공주님에게 도망치려는 나, 그런 나를 요구해주는 공주님.
강한 바람이 불어 창문에 빗방울을 흩뿌렸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중 오타쿠 친구를 설득할 수단을 생각해냈다.
[너 에어 조단 시리즈 좋아하지?
프리미엄 붙은 물건 가지고 있는데, 어때?]
효과는 발군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답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녀석 성격은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들여다 보지도 않았겠지.
273
약속한 역에 나가보니 이미 그녀는 벌써 도착해서
근처 빵집 카페 안에 들어가 있었다.
유리 창 바로 옆자리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
가볍게 한숨을 쉬던 중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계산을 마친 그녀가 어느샌가 가게에서 나왔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화장도 진하지 않은데다 전체적으로 점잖은 옷차림이었다.
전날 봤던 가벼운 느낌은 온데간데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아이같은 모습도
취해서 마구 흩트러졌던 모습도
어제밤새 펑펑 울었던 가여운 여자의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딘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귀한집 아가씨 같은 여성이 서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를 집에 데려갔을 때
가족들에게 미칠 악영향과 충격에 대해 생각해봤다.
흥분한 아버지가 넋이 나간 동생.
하얀 코트를 걸친 그녀는 설녀처럼 우리집 사람들을 얼려버릴 것이다.
과장된 미국 콩트 프로그램 같은 장면만이 떠올랐다.
하지만 갈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녀가 원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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